[신경영 20년…삼성 DNA를 바꾸다] "質보다 量이라고?"…발끈한 이건희, 스푼을 내던지다
1993년 6월5일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1등석. 이건희 삼성 회장은 이륙 후 골똘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몇 시간쯤 지나 수행 임원을 불렀다. “일본인 고문이 올린 보고서를 봤는데 ‘삼성 사람들은 공장에서 콘센트가 발에 걸리적거려도 정리할 생각을 않고 무심히 지나친다. 이런 기본적인 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돼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회장이 언급한 보고서는 당시 삼성전자 고문이었던 후쿠다 다미오와 기보 마사오가 작성한 것이다. 후쿠다 보고서는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이며 기보 보고서는 사업장의 정리정돈 및 청결 상태 등 기본에 관한 사항이었다. 말문을 연 이 회장은 삼성 변화·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기내에서 7시간 동안 얘기했다. 강연은 숙소인 켐핀스키호텔에서도 이어졌다. 신경영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히 하루이틀 생각한 게 아니라 10년 이상 후계자 수업을 받고, 회장직을 5년 하고 나서 쌓였던 고민과 열정을 폭발시킨 것이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한 말에 그런 뜻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신경영이 어떤 것이길래 삼성은 그후 대변신을 거듭,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을까.


(1) 변해야 산다
“서로 믿을수 있을때 변할 수 있다비판 두려워 말고 의식부터 바꾸자”
공채 학력파괴·철저한 보상…


기업은 변화, 개혁을 부르짖는다. 바뀌지 않고선 변화에서 도태돼서다. 디지털화 대응이 늦어 뒤처진 소니, 스마트폰 폭풍에 휩쓸려 난파한 노키아 등이 좋은 사례다.

그렇지만 이 회장이 달랐던 점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의식부터 바꾸자”는 데 있었다. 제도 변경으로 개혁을 시작한 게 아니라, 의식 구조란 근원을 바꾸는 데서부터 접근한 것이다. 이 회장은 “이기주의만 없애면 단합이 되고, 힘을 합치면 어떤 일이든 이 지구상에선 1등을 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 변할 수 있다 △정도를 걷자 △뒷다리를 잡지 말자 △비판을 두려워 말자 등 의식 개혁에 나섰고, ‘한 방향으로 가자’며 변화의 방향을 제시했다. 또 제도적인 뒷받침에 나섰다. 1993년 8월 전격적으로 ‘7·4제’를 실시했다. 오전 7시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하는 이 제도는 회장의 개혁 철학을 임직원이 체감토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1995년 공채에서는 파격적으로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2) 질경영
“세계 일류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1년간 문닫더라도 불량률 없애라”
불량 휴대폰 화형식·갤럭시 커버 폐기

이 회장은 지속적으로 ‘품질경영’을 주문했다. “세계 일류가 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난다. 1년간 회사 문을 닫더라도 불량률을 없애라”고 했지만 삼성 조직은 꼼짝하지 않았다. 1960~70년대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시절을 겪은 경영진에는 ‘어떻게든 많이 만들면 된다’ ‘양이 최고다’란 의식이 뿌리깊었다.

1993년 6월15일 이 회장은 “질로 가서 점유율이 떨어지고 적자가 나도 좋다. 적자가 나면 내 사재라도 털겠다”며 10여 시간이 넘게 강의했다. 강의 직후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이 여러 사장과 함께 이 회장 방을 찾아왔다. “회장님, 아직까지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임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질경영은 ‘불량제품 화형식’을 거쳐 삼성 임직원에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사업부는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그해 3월9일 수거된 15만대의 휴대폰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았다.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명이 전화기를 내리쳤다.

삼성이 갤럭시S 시리즈로 초일류 기업이 된 것도 이 같은 질경영에 기초한다. 작년 5월 갤럭시S3가 출시되기 3주 전, 뒷면 커버의 질감이 초기 기획 단계 때보다 일부 떨어졌다. 10만개의 커버가 생산된 상태였고, 수출을 앞둔 갤럭시S3가 비행기에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화형식은 없었지만 10만개의 재고는 모두 폐기, 교체됐다.


(3) 복합화·정보화·국제화
“세계 챔피언이 진짜 챔피언, 한 건물에 있어야 시너지”
수원 등에 복합단지 조성



이 회장은 복합화, 정보화, 국제화를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80년대에는 국내에서 챔피언이면 챔피언이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챔피언이라야 챔피언이다”며 국제화를 강화했다.

주목할 것은 복합화에 대한 생각이다. 이 회장은 복합화를 ‘누운 것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공장, 식당, 집 등을 100층짜리 빌딩에 모아놓으면 효율이 커질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 회장은 “100층이든 80층이든 빌딩에 기획, 디자인, 설계, 판매 등 각 조직 담당자가 모두 입주해 있다면 필요할 때 40초면 회의실에 모일 수 있다”고 빌딩 복합화의 예를 들었다. 복합화는 빌딩뿐 아니라 도시 공장 병원 등에도 다 적용된다. 삼성이 수원 화성 아산 등에 대규모 용지를 확보한 뒤 공장과 연구시설, 병원, 학교 등을 넣어 대단위 복합단지로 개발한 것은 이 회장의 이 같은 발상에서 비롯됐다.

프랑크푸르트=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