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라이벌] 홈런왕 베이브 루스·핏빛 투혼 커트 실링…별들의 야구 전쟁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라이벌이다. 1932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야구배트를 어깨 위로 치켜들어 먼 외야 관중석을 가리킨 뒤 담장 밖으로 공을 넘겨버린 베이브 루스(양키스)의 예고 홈런. 인대수술을 받은 상태로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올라 흰 양말이 레드삭스(빨간양말)가 되도록 핏빛 투혼을 보여준 2004년 커트 실링(레드삭스)의 역투.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를 기념하는 날에 데이비드 콘(양키스)이 1999년 기록한 퍼펙트 피칭.

이 모두가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영웅들이 만들어낸 야구사에 빛나는 장면들이다.


● 초기 강자는 레드삭스

미국에서 야구는 180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대중 스포츠로 퍼져나갔다. 1845년 은행원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주도로 월스트리트 청년들이 ‘뉴욕 니커보커스’라는 최초의 야구팀을 만들었다.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속속 야구팀들이 생겼다. 1871년에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등 10개 팀이 참가한 최초의 프로리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 탄생했다. 1876년에는 내셔널리그, 1901년에는 아메리칸리그가 각각 출범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1901년 출범한 8개 아메리칸리그 팀 중 하나다. 1869년 만들어진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의 감독 헨리 라이트를 보스턴이 영입하면서 팀의 애칭을 따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명칭이 굳어졌다.

뉴욕 양키스는 영국보병연대의 이름인 ‘하일랜더스’가 양키하일랜더스가 됐다가 양키스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메이저리그 초기의 강자는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1903년 내셔널리그 우승팀과 아메리칸리그 우승팀 간 열린 최초의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은 피츠버그를 제압했다. 이후 20년 동안 네 번(1912, 1915, 1916, 1918년) 더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레드삭스가 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발행인 찰스 테일러의 아들 존 테일러가 있었다. 그는 보스턴 구단을 인수한 뒤 과감하게 투자했다. 1901년 3500달러의 연봉을 주고 영입한 사이 영의 활약으로 레드삭스는 최고의 팀으로 부상했다. 1901년 이후 3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한 영은 월드시리즈에서 네 번 등판해 2승 1패 1.85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15년에는 베이브 루스가 합류했다.

●밤비노 저주와 양키스 전성시대

레드삭스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뉴욕 양키스는 1919년까지 리그 2위를 세 번 차지한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달라진다. 양키스는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2년 동안 일곱 번이나 리그를 제패했다. 월드시리즈 우승도 네 번 차지했다.

양키스 역시 구단주의 과감한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 1915년 양키스 구단을 인수한 제이콥 루퍼트는 1919년부터 1922년까지 레드삭스로부터 베이브 루스, 웨이트 호이트 등 핵심선수 11명을 영입했다.

반면 레드삭스 구단을 1916년 사들인 뉴욕 출신의 연극인 해리 프레이지는 야구보다 공연 제작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는 브로드웨이 공연 제작비용과 팀 인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선수들을 바겐세일했다.

양키스의 홈구장인 양키스타디움이 문을 연 1923년. 7만4200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루스는 레드삭스를 상대로 개장 첫 홈런을 쳤다. 이후 보스턴은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베이브 루스의 악령이 보스턴의 우승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밤비노(베이브 루스의 애칭)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다. 레드삭스는 1922년부터 1933년까지 12년간 리그 꼴찌만 아홉 번이나 했다.

● 라이벌 구도를 다시 만들다

레드삭스가 ‘암흑의 시기’에서 벗어나 전력을 회복한 것은 1930년대였다. 정열적인 구단주 톰 야키가 1934년 구단을 인수하면서 레프티 그로브, 조 크로닌, 지미 팍스 등 나중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 3명을 데려왔다. 레드삭스는 1934년 5할 승률을 16년 만에 회복했고, 1930년대 후반 정상권 팀으로 발돋움했다.

같은 리그에 속한 양키스 전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양키스 제국’의 벽에 번번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나마 양키스가 부진했던 시기에 레드삭스는 세 차례(1967, 1975, 1986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모두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했다.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역학 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95년 와일드카드 제도 도입이다. 2위팀도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낼 수 있게 되면서 양키스와 함께 동부지구에 속해 있던 보스턴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외계인’으로 불리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역투를 펼친 1999년에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던 2003년에도 승리는 양키스 몫이었다.

2004년. 두 팀이 우승을 향한 길목에서 다시 만났다. 레드삭스는 내리 세 게임을 졌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양키스 승리를 점쳤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데이비드 오티스의 연장 끝내기 홈런과 투수 커트 실링의 삼진쇼가 이어졌다. 4-3의 대역전극. 레드삭스는 이어 내셔널리그 우승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만나 4연승으로 이겼다. 레드삭스 팬들은 그날 저녁 보스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비노의 저주가 86년 만에 끝났다”고 환호했다.

● 선수 연봉과 구단가치

뉴욕 양키스 선수들의 연봉 총액은 압도적인 1위다. 2012년 연봉 총액은 2억370만달러였고 연봉랭킹 1~5위 선수 가운데 3명(1위 알렉스 로드리게즈, 4위 마크테세이라, 5위 사바시아)을 보유하고 있다. 세 선수의 연봉을 합친 돈(7612만달러·약 879억원)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2012년 연봉총액(3980만달러·약 449억원)의 두 배에 가깝다.

레드삭스의 구단주 래리 루치노는 자유계약선수(FA)시장에 나온 선수들을 양키스가 독점하자 2003년 ‘악의 제국’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보스턴도 전력 강화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올해 보스턴의 연봉 총액은 1억6480만달러로 양키스, 필라델피아필리스에 이어 메이저리그 3위다. 2010년 영입한 멕시코 출신의 강타자 아드리안 곤잘레스에게 2185만달러, 통산 427개(2011시즌 기준)의 도루를 성공시킨 ‘질주본능’ 칼 크로포드에게 2035만달러, 에이스 투수 조시 버켓에게 1700만달러의 연봉을 주고 있다.

미국 잡지인 ‘포브스’가 201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양키스 구단가치는 17억달러, 레드삭스는 9억1200만달러에 달했다. 두 팀이 2011년 벌어들인 수입은 양키스와 레드삭스 각각 4억2700만달러와 2억7200만달러로 나란히 메이저리그 1, 2위를 차지했다.

● 전통과 혁신

펜웨이파크는 미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메이저리그 구장 가운데 하나다. 좌석이 좁고 입장료도 비싸지만 ‘살아 있는 야구의 역사’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펜웨이파크에는 외야 좌측에 11.2m 높이의 초록색 펜스가 있다. ‘그린 몬스터’라는 애칭이 붙은 이 펜스는 장타자의 홈런을 앗아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양키스는 2009년 뉴양키스타디움을 개장했다.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가 뛰었던 전설의 구장은 사라졌다. 양키스가 바꾸지 않고 고수한 것은 N자와 Y자가 결합된 팀 로고와 줄무늬 유니폼이다. 1909년 고안된 양키스 로고와 1912년 등장한 줄무늬 유니폼은 양키스 전통과 권위의 상징이다.

이지훈 한국경제신문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