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와 테크니션의 '피아노 배틀'… 황제는 누구 손을?
[세기의 라이벌] 모차르트 vs 클레멘티
‘클레멘티의 소나타를 듣거나 쳐본 사람은 그 곡들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느낄 것입니다.

6도와 8도 이외에는 뛰어나게 좋은 악절도 없고, 아무리 잘 친다고 해도 흉측하게 끊어진 소리밖에 나지 않습니다. 나의 누이에게 간청하나니, 이 형편없는 클레멘티의 곡들을 너무 열심히 연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략)그는 소나타에 프레스토나 프레스티시모, 2분의 2박자로 써놓고는 자기는 4분의 4박자 알레그로로 연주합니다. 내가 직접 들어봐서 잘 압니다. ’

천재 중의 천재 작곡가로 불리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1783년 누이 나네를 모차르트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세 살 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고,다섯 살 때 작곡을 했으며 일곱 살 때 바이올린 소나타,여덟 살 때 교향곡,열두 살 때 오페라까지 작곡한 모차르트를 질투하게 만든 사람.

이탈리아 태생의 영국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였다.

궁정에서 만난 라이벌

클레멘티라는 이름이 낯설더라도 피아노를 배워본 사람이라면 그가 작곡한 ‘소나티네’를 모를 리 없다.

1752년 로마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클레멘티는 피아노만을 위한 곡을 만든 첫 작곡가였다.

피아니스트로는 물론 작곡가,피아노 제작자,악보 출판업자 등으로 활약한 그는 아홉 살 때부터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고 열여덟 살에 공식 데뷔 무대를 가졌다.

생전에 110여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수많은 교향곡을 남긴 그는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피아노 주법의 기본을 만든 음악가다. ‘피아노포르테의 아버지’ ‘현대 피아노 테크닉의 교과서’로 불린 그는 베토벤이 가장 존경한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개발한 부드럽고 기교 넘치는 레가토 스타일은 카를 체르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요하네스 브람스 등을 포함해 19~20세기 피아니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네 살 아래의 괴짜 음악가 모차르트를 처음 만난 건 오스트리아 빈에서였다.

1780년부터 3년간의 유럽 연주여행을 계획한 그는 프랑스 파리의 마리 앙투아네트 궁전과 독일 뮌헨,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공연을 마치고 1년 만에 빈에 다다랐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그를 초청했다. 단,조건이 있었다.


각자 작곡한 곡으로 모차르트와 경연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1781년 12월24일 오스트리아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모차르트와 영국 최고의 피아니스트 클레멘티가 라이벌로 처음 만났다.

무승부로 끝난 첫 대결

요제프 2세는 그들에게 궁정악기를 사용하도록 했다.

궁정악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그렇게 형편없는 악기로는 연주할 수 없다”고 불평했지만 황제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며 딱 잘라 말했다.

클레멘티는 후에 “황제는 마치 권투 매니저가 선수에게 ‘어린아이 같은 상대방이 감히 어떻게 우리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듯 위엄 있고 자신 있게 말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클레멘티와 모차르트는 소나타,토카나 등 즉흥연주를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둘이 2중주를 연주했는데 이때 모차르트가 주제를 선택해 쳤고, 클레멘티는 화성을 넣었다. 모차르트가 주제를 발전시키는 동안 클레멘티는 제2 피아노로 반주를 맡았다. 둘이 서로 파트를 바꿔 연주한 이날의 경연은 여러 선율이 어우러진 화려한 피아노 2중주로 끝을 맺었다. 승부는 나지 않았다.

구전에 의하면 클레멘티가 이겼다고도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브리디라는 사람은 그날의 경연에 대해 “황제는 대공작부인과 내기를 했고,그 내기에 이기셨다”는 애매한 말만 남겼다.

경연이 끝난 후 클레멘티는 모차르트에게 “노래하는 듯한 터치와 고상한 테이스트에 경의를 표한다”고 예를 갖췄지만 모차르트는 그에게 손짓만으로 건방지게 작별인사를 했을 뿐이다.

경연이 있은 뒤 한 달도 채 안 돼 모차르트는 아버지에게 “클레멘티는 뛰어난 연주자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그의 오른손은 뛰어나게 잘 돌아간다.

장기는 3도인데 그것뿐이고 감정은 단 1푼도 없다”고 편지를 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는 다음해 클레멘티의 소나타 몇 개를 대충 훑어본 후 누이에게 ‘클레멘티를 연습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마술피리'에 담긴 질투

두 라이벌이 만난 지 10년 뒤,모차르트가 괴짜임을 증명하는 일이 또 한번 벌어졌다. 모차르트는 그토록 혐오하던 클레멘티의 ‘소나타 내림 나장조’의 시작주제를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 서곡에 도입했다.

작곡가가 다른 이의 곡을 빌려와 쓴다는 건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음악가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클레멘티에게 어떤 통보를 하거나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사용했기 때문에 적어도 경의의 표현이라는 해석은 딱 들어맞지 않는다.

1780년대 말 모차르트는 이미 경제적으로 심하게 침체돼 있었다.

지방 극장을 경영하던 배우 친구를 위해 오페라 ‘마술피리’를 만들던 모차르트는 그 해 봄 춤곡, 기계 오르간과 글라스 하모니카를 위한 곡, 협주곡이나 5중주 등 클라리넷을 위한 다수의 작품을 작곡하며 바쁘게 지냈다.

1791년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를 초연하기 10년 전에 클레멘티가 작곡한 ‘소나타 내림 나장조’는 저작권을 등록하거나 공식적으로 출판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소송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마술피리’를 끝내자마자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클레멘티는 7남매의 장남,모차르트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유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7남매 중 살아남은 볼프강과 누이 나네를이 각각 6,11세가 됐을 때 뮌헨의 바바리아 선거후와 빈의 황후 마리아 테레사 앞에 데리고 가 연주를 하게 했다.

모차르트는 일곱 살에 온 가족과 함께 파리와 런던으로 향했고 프랑스와 영국의 군주들 앞에서 연주했다.

이때 이미 작곡을 시작해 열 살에 오페라 ‘위장한 바보’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잘츠부르크, 뮌헨, 파리를 오가며 작곡 활동을 했고 잘츠부르크 궁정을 위한 종교음악,교향곡, 세레나데,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그는 죽기 전까지 10년간 빈에서 레슨과 연주 일정을 소화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비슷한 유년, 달랐던 만년

클레멘티는 열네 살 때 로마를 방문한 영국 부호이자 런던의 두 번째 시장인 피터 벡포드의 눈에 들었다.

벡포드는 클레멘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재정적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약 8년간 피아노 교육을 맡았다.

1774년 후원자로부터 벗어난 클레멘티는 런던으로 이주해 성공적인 솔로 무대를 펼치며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다.

모차르트와의 대결이 있은 후부터 20년간 그는 영국에 머물며 피아니스트,지휘자, 교육자로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한다.

이후 쇼팽,멘델스존 등의 스승이 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모차르트가 자유롭고 화려한 유년기를 보낸 뒤 궁핍한 말년을 맞았다면, 후원자의 그늘에서 10년을 갇혀 지내야 했던 클레멘티는 금전적으로 풍요로운 노년을 맞았다.

모차르트는 짧은 생애의 말년을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걱정과 좀 더 싼 아파트로 옮기는 이사 문제, 건강 악화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며 보냈다.

부인의 품 안에서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묘비도 없는 무덤에 던져졌고, 장례 행렬에는 단 몇 명의 애도자만 따랐다.

반면 피아노 제조사와 악보 출판 및 저작권 회사를 운영해 큰 수익을 낸 클레멘티는 1807년 피아노 공장 화재로 4만파운드 이상의 손실을 보기도 했지만 그의 곁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있었다.

베토벤은 그가 만든 모든 곡의 영국 내 저작권을 클레멘티에게 위탁했다.

베토벤 음악의 편집자이자 해설자로 영국 내에서 작곡가로서만큼이나 큰 명성을 얻은 클레멘티는 1826년 그의 대표곡을 모은 ‘파르나수스 산에 이르는 계단’ 전 3권을 완성했다.

80세가 되던 해, 그는 친구들과 가족의 애도 속에서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었다.

모차르트의 쓸쓸한 최후와 너무나 대비되는 노후였다.

김보라 한국경제신문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