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늦가을,남쪽의 작은 도시에 간 적이 있다. 막 수능시험을 치른 고등학교 3학년 전체 학생들에게 특강을 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바쁜 고3생들이 내 소설을 찾아 읽었을 리 만무할 테니 특별히 문학에 관심이 있지 않은 아이들에겐 그저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이벤트 정도일 거라 짐작하면서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아이들은 다른 어떤 강연의 청자들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말 한마디한마디에 눈을 반짝이며 열중하는 준비된 청중들이 거기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난 뒤 여러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작가님처럼 저도 글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글 쓰는 사람.' 그 말을 또박또박 힘주어 읽어보았다. 글 쓰는 사람인 내가,글 밖에서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그때 알았다. 이 아이들에게 꿈의 구체적인 실체를 만지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도.

10대 시절의 나에겐 꿈이 없었다. 눈앞의 시험을 잘 봐야 하고 지난번보다 한 등수라도 올려야 하며 결국엔 대학에 합격해야 한다는 목표는 선명했으나 그뿐이었다. 그 너머에 올 날들은 언제나 희뿌연 안갯속에 뒤덮여 있었다. 방송 프로듀서,잡지사 기자,문화인류학자 같은 직업의 세계에 막연한 호기심을 품었지만 구체적으로 상상하기에는 당장의 현실이 버겁기만 했다. 그 직업을 가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그 직업을 가지면 현장에서 실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내가 그 직업에 어울리는 적성을 가지기나 한 것인지,인생의 선배가 단 한 번만이라도 차근차근 알려주었더라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제 어른이 돼버린 우리는 어떻게 든든한 선배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여기,어린 후배들에게 자기 꿈의 한 조각을 나누어주려는 선배들의 움직임이 뜨겁게 번져가고 있다. 시작은 자그마했다. 한 젊은 과학자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평소 과학자를 직접 대하기 어려운 작은 도시와 농촌지역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면서부터였다. 여기저기서 같은 뜻을 갖고 있는 이들이 나타났다. 대학원생,과학선생님,연구원,의료인 등 평소 과학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싶다는 글을 앞다퉈 올렸다. 나눔의 방식은 도서관에서의 과학 강연.각자가 가진 재능을 무료강연을 통해 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동참의사를 밝혀 강연기부를 하게 될 사람이 벌써 100여명에 이른다는 소식에 새삼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같은 날,같은 시간,전국 중소 도시와 농촌 각지의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직접 강연을 하는 과학자만이 이 행사의 주체는 아니다. 행사 준비와 진행,홍보 포스터 디자인 등도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이 맡아 꾸려가고 있다. 어느 유명한 작곡가는 로고송을 직접 만들어 기부했다고 한다. 정부기관이나 사회단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개개인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하나 추진해온 일이니 그야말로 진정한 풀뿌리 기부라고 할 만하다.

모두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이 어른들 역시 한때는 막연한 안개 숲 앞에서 머뭇거리는 작은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누군가 따뜻하고 도타운 손을 내밀어 그 조그맣고 여린 손을 꼭 잡아주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10월의 하늘'이란 행사 이름이,또 '오늘의 과학자,내일의 과학자를 만나다'라는 표어가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이유다.

오는 30일 토요일 오후 2시.과학자를,과학을,꿈을 만나고 싶은 어린이들은 집 가까운 곳의 작은 도서관으로 모두모두 모이시라.10월의 하늘은 높고 맑고 아름답다.

정이현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