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적응이 문제이긴 하다. 밤 9시이니까 한국시간으로 새벽 5시.한참 꿈나라를 헤맬 시간인데도 깨어 있으니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눈꺼풀에는 바윗덩어리가 얹혀진 듯하다. 그렇더라도 이 좁은 호텔방에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잠을 청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 시차교란에 지친 몸을 달랜 뒤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광장과 골목을 쏘다니며 사람들과 부딪히고 산타아나 광장 부근의 타파스 바에서 상그리아 한잔이라도 해야 정답이다. 왜? 헤밍웨이의 말대로 마드리드에서는 밤을 죽여버리기 전에 잠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Take 1) 예술이 숨쉬는 마드리드
그럼 대낮에는? 학교 다닐 때 교양과목을 소홀히 했거나 미술에 까막눈인 사람이라면 좀 심심하겠다. 미술작품 감상 없는 마드리드 여행은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이웃 톨레도로 놀러가 오래된 골목길에서 헤매기를 빼놓는다면 말이다. 물론 고상한 미술관 투어라고 해서 지레 거북해할 일은 아니다. 가이드만 잘 만나면 쉬 교양도 쌓고 그림 보는 안목도 높일 수 있으니 그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지 않겠는가.

자! 로마에선 로마사람 되고,마드리드에선 마드리드 분위기를 따를 것.첫 번째 목적지는 프라도 미술관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유럽의 문화지형도에서 마드리드의 위치를 중요하게 해주는 곳이다.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왕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1819년 건립됐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엘 그레코,벨라스케스,고야,무리요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소장돼 있는 회화작품이 8000점을 웃돈다. 특히 렘브란트 이전의 네덜란드 대가의 그림 모두와 벨라스케스 작품 80%가 이곳에 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보스는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죽기로 결심하다'에도 이름이 나오는 네덜란드 천재화가. 천국과 속세,지옥을 그린 세폭그림인데 상상력의 정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 백인철씨는 "스필버그나 제임스 카메론 등이 미지의 세계나 우주를 그릴 때 참고한 그림"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의 만물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각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라파엘로의 '성가족' 3부작에도 눈이 간다. 루벤스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 또한 도록에서 많이 본 그림.모두들 균형과 비례에 맞게 그린 반듯한 그림들이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엘 그레코부터 붓터치가 달라지는 것 같다. 무언가 터프하고 역동적이며 음울해 보이기도 한다. 잘 찍은 사진 같은 르네상스풍에 대한 도전에서 출현한 '일그러진 진주'란 뜻의 바로크풍이 엘 그레코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도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피카소가 42개의 버전으로 해체해서 그렸을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림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실제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듯 공간감이 깊다. 2차원 평면에 묶였던 그림이 3차원 공간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Take 2) 중세의 성채도시, 톨레도

그림에 빛을 붙잡아 넣는 데 탁월했던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와 '옷을 입은 마야'도 낯익다. 벌거벗은 마야는 누드화로는 처음으로 보통 여자가 등장한 그림이란다. 고야의 '1808년 5월2일'과 '1808년 5월3일' 또한 표현주의 회화의 시작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작품이다. 마드리드 시내에서의 미술관 투어라면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를 소장하고 있는 소피아왕비예술센터를 빼놓을 수 없다. 프라도미술관을 보완해 주는 튀센보르네미사박물관도 필수 코스.

자,이제 마드리드를 벗어나 톨레도로 향한다. 톨레도는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긴 타호강에 둘러싸인 중세의 성곽도시.마드리드 남쪽으로 A42번 국도를 따라 70㎞쯤 떨어져 있다. 6세기께 이슬람 세력에 점령됐다가 1085년 스페인의 이방원 격인 알폰소 6세가 무혈입성할 때까지 400여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다.

우선 톨레도 전경.타호강 건너 길가의 전망 포인트에 서면 톨레도 전경이 한눈에 잡힌다. 마드리드에 왔다는 증명사진을 찍는 곳이다. 톨레도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은 비사그라 문이다. 1550년 프랑스의 샤를 5세 왕을 맞이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 문을 지나면 산티아고 델 아라발 성당이 나온다. 스페인과 아랍의 건축양식이 섞인 무데하르 양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톨레도의 만남의 장소 격인 소코도베르 광장에서 코메르시오 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웅장한 대성당이 나타난다. 1227년에 첫삽을 떠 266년 만에 완공한 성당은 스페인의 다른 모든 성당처럼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형상이다. 행렬용 성체안치기의 황금빛이 찬란하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서 처음 가져온 사금 16㎏으로 도금했다고 한다. 589년 성모가 나타나 주교에게 금으로 된 망토를 전했다고 하는데 그때 성모가 밟았다는 돌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만지며 소원을 빈다.

성당 내에도 그림이 많다. 엘 그레코의 '성의의 박탈'이 대표적이다. 지겹지 않다면 그림 하나만 더 볼까? 역시 엘 그레코 작품으로 산토 토메 성당에 있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다. 생동감 넘치는 화면 구성과 화려한 색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톨레도에선 그림을 보는 것보다 길을 잃고 헤매봐야 한다. 아무런 계획 없이 좁은 골목을 돌아다니며 유럽의 중세를 느껴보는 것이다. 예쁜 기념품 가게에 들러 금속세공품이나 가죽제품을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에서 맛보는 타파스 한접시와 맥주 한잔도 별나다. 그리고 좁은 카페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비벼대며 마시는 상그리아 한잔에 톨레도를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마드리드=글 사진 김재일기자 kjil@hankyung.com

■ 여행 TIP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남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입헌군주국이다. 수도는 마드리드.인구는 4300만명.94%가 가톨릭 교도다. 국토면적은 남한의 5배가 조금 넘는 50만5000㎢.2008년 기준 1인당 GDP는 3만4000달러.유럽연합(EU) 국가로 유로화를 쓴다. 현금매입 기준 1유로에 1658원 선.한국보다 8시간 늦다. 마드리드는 우리나라와 날씨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어댑터 없이 우리나라 전기기구를 쓸 수 있다.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훈제해 숙성시킨 '하몬'을 맛보자.마요르광장 근처의 '카사 보틴'은 1725년 개업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라고 한다. 유명인사들이 자주 찾는다고 한다. 새끼돼지 통구이인 코치니요 아사도도 맛볼 수 있다. 숙소는 충분하다. 옛 성이나 궁전,수도원 등을 개조해 만든 국영 호텔 파라도르도 좋다.

카타르항공(02-3708-8571,www.qatarairways.com/kr)이 도하 경유 마드리드행 항공편을 운항한다. 3월 말부터 도하 직항노선이 새로 개설돼 한층 편하게 갈 수 있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까지 버스나 기차를 이용한다. 1시간에서 1시간반 걸린다. 페가수스코리아(02-733-3441)가 다양한 일정의 스페인 여행을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