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총선 압승… 재정 부족·反美 시비 등 ‘첩첩산중’

[Focus] 54년만에 여야 정권교체… ‘새로운 일본’ 순항할까
일본에서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여야 정권이 교체됐다.

지난 8월30일 실시된 일본 총선거(중의원 선거) 개표 결과 제1야당인 민주당은 총 480개 의석 중 308석을 차지, 과반수(241석)를 훨씬 웃도는 의석을 획득해 압승을 거뒀다.

반면 54년간 집권 여당 자리를 지켰던 자민당은 119석에 머물렀다.

일본 총선에서 야당이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해 정권을 잡기는 2차대전 이후 처음이다.

1955년 창당 이후 일본을 통치해온 자민당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은 '새로운 일본'의 출발을 의미한다.

지난 54년간 자민당 정권이 구축한 정치 · 경제 · 외교의 틀은 다시 짜여진다.

민주당은 일본의 '전후(戰後) 체제'를 떠받쳐온 자민당의 보수주의 · 성장 중시 · 친미 외교의 세 기둥을 뜯어고칠 태세다.

정치에선 중도 보수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관료 우위의 정책결정 시스템을 철저히 쇄신할 계획이다.

수출 ·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전략을 바꿔 중소기업 · 서민을 배려하고 복지에 치중할 예상이다.

'성장'에서 '분배'로의 전환이다.

또 미 · 일 동맹을 골간으로 한 친미 안보외교가 그동안 일본 외교의 중심이었다면 앞으론 '자주'가 강조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총선은 '만년 여당' 자민당에 대한 심판 성격이 강했다.

야당인 민주당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자민당이 못마땅해 일본 국민은 '정권 교체'를 선택했다.

일본 국민은 왜 자민당에 등을 돌렸을까.

전문가들은 경기 악화를 가장 큰 배경으로 꼽는다.

김숙현 도호쿠대 법학부 교수는 "원래 보수적인 일본 국민의 마음이 자민당을 떠난 건 경제 사정이 나빠진 게 핵심 요인"이라고 말했다.

실제 일본의 7월 실업률은 5.7%로 관련 통계를 잡기 시작한 1953년 4월 이후 최악이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 붕괴 때보다 심각하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생활이 빈곤해지고 있다'는 응답 비율이 전체의 절반이 넘는 57%에 달했다.

이 역시 1953년 조사 이후 가장 높은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경기 대책은 헛발질이었다.

다나카 나오키 국제공공정책연구센터 이사장은 "일본은 돈은 돈대로 쏟아붓고도 효과가 별로 없는 데 쓰는 바람에 선진국 중 경기 회복이 가장 늦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민당은 국민에게 비전과 희망이 아니라 구태정치만 보여주자 '못살겠다,바꿔보자'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김 교수는 "국민은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자민당 정권은 총리직을 세습 정치인인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가 돌아가며 맡다가 무책임하게 내팽개쳤다"며 "민심과 동떨어진 정치 행태에 일본 국민이 화가 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게다가 △5000여만건의 납부 기록이 사라질 정도로 부실한 연금 관리 △올초 나카가와 쇼이치 재무상의 로마 '음주 회견' △아소 총리의 잇단 실언 등 최근 2~3년간 속출한 악재는 민심 이반을 재촉했다.

자민당이 이처럼 인기를 잃어가는 사이 민주당은 선거에서 △자녀 1인당 중학생까지 월 2만6000엔(약 34만원) 지급 △고교 무상화 △고속도로 무료화 등 인기 공약을 쏟아냈다.

관료들이 모든 정책을 만들고,그것을 매개로 정치권 · 관료 · 기업이 서로 얽힌 정 · 관 · 경 유착의 '먹이사슬' 고리를 끊겠다고 공언했다.

외교 부문에선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 설정을 강조하며 일본 정가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민주당이 '일본의 새로운 출발'에 시동을 걸기도 전에 여기저기 암초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외교노선 전환에는 반미주의란 비판이,행정 개혁엔 관료들의 반발이, 경제정책 수정엔 재원 확보 문제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우선 민주당이 국민들에게 약속한 '생활 지원' 공약 실천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일본의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170%에 달할 정도로 재정이 심각한 적자 상태여서다.

공약을 모두 지키려면 2013년까지 16조8000억엔(약 220조원)이 필요하다.

올해 일본 정부 예산(207조엔)의 8%를 넘는 규모다.

민주당은 이 돈을 낭비 예산 절감(9조1000억엔),국유자산 매각(5조엔),조세 감면 축소(2조7000억엔) 등으로 조달하겠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세금을 올리지 않고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 해결한다는 것.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예산 절감의 타깃인 공공사업비는 고이즈미 내각 때부터 계속 줄여 더 줄일 것도 없는 상황이다.

공무원 임금 삭감은 민주당 지지세력인 공무원노조가 반대할 게 뻔하다.

민주당이 과감히 줄이겠다는 정부 보조금도 노인간호나 생활보호 등 대부분 복지비용이어서 감축 여지가 많지 않다.

결국 공약 이행을 위해선 국채를 더 발행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재정 파탄이 우려된다.

반미 관련 시비도 민주당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다.

차기 총리 취임이 확실한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는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의 바탕이 된 '나의 정치철학'이란 논문에서 "일본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시장원리주의에 농락당했다"며 "지금의 세계경제 위기도 미국의 시장원리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파탄이 초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안보 전략은 미 · 일 동맹이 근간이라면서도 "미국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수 측의 공격이 집중되고 있다.

오카모토 유키오 외교평론가는 "하토야마 대표만큼 미국을 비판하는 국가 지도자는 이란이나 베네수엘라 대통령밖에 없다"며 "특히 '일본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독립을 유지할까'라고 쓴 것은 미국이 일본의 동맹국이란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무성 관계자도 "자민당이 한때 정권을 놓쳤던 1993년 호소카와 내각 때 미국과 관계가 서먹해져 그걸 복구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며 "대미외교는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야당이 된 자민당이 극우파 의원을 중심으로 '현실론'을 내세워 외교 · 안보정책을 물고 늘어지면 민주당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민주당은 국정 경험이 한 번도 없는 데다 당내에 외교전문가도 거의 없다.

관료 개혁에도 난관이 많다.

관료조직은 50년 이상 쥐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버틸 게 분명하다.

특히 관료들은 모든 정보를 갖고 있는 데다 전문성으로 무장하고 있다.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정권이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게 관료들의 사보타주(태업)다.

관료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국정 운영에 차질이 생겨 결국은 개혁을 포기하고 관료들과 타협하는 게 일반적 사례다.

고이즈미 내각에서 총무상을 지낸 다케나카 헤이조 게이오대 교수는 "관료를 개혁하려면 관료보다 더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필요하다"며 "그러나 현재 민주당에는 그런 전문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