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5억명의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EU는 국내총생산(GDP) 17조달러의 세계 최대 단일시장이고,중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많이 교역하는 곳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에 대한 EU의 관세수준이 높은 편이고,FTA 이행 3년내 관세철폐 비율이 96% 이상이므로 많은 기업들이 FTA 경제이익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경제이익의 상당부분은 제조업의 구조조정을 전제로 달성되며,원활한 산업구조조정 없이는 FTA 경제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EU와 같은 거대경제권과의 FTA 추진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는 무역조정지원제도(TAA)를 입법화해 2007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소요예산의 부담과 도덕적 해이를 우려한 당시 정부는 수입개방으로 인해 매출액이 25% 이상 감소할 경우 무역조정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엄격한 기준을 설정했다.

지난 2년 사이 5개 업체가 무역조정지원을 신청했고 이중 4개 업체가 지원자격이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와 관련해 몇가지 문제가 제기됐다. 당초 예상보다 적은 수의 기업들이 무역조정지원을 신청하고 있다는 점과,무역조정지원 자격 요건 충족 자체가 어려워 기업들이 신청을 기피한다는 점,지원 신청과 실제 지원까지 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지금까지 지원업체 수가 적은 것은 입법 과정에서 협정 이행을 가정했던 미국 일본 등 거대경제권과 FTA가 체결되지 않았고,아세안 등과 체결한 협정의 관세양허가 부실해 실제 피해발생 가능성 자체가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 예상하지 않았던 EU와의 FTA가 이들 미국 일본과의 FTA보다 먼저 이행될 것으로 예상되고,다양한 산업구조를 고루 갖춘 EU 27개국으로부터 수입이 늘어날 경우 국내 산업의 피해가 클 수 있다.

예를 들어 EU의 각 회원국이 10개 품목에 대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최소 270개 품목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무역조정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EU와의 FTA 타결 직후 돼지고기와 낙농제품에 대한 피해우려와 대책마련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냉동 삼겹살의 대부분이 수입품이고,국내 수입물량의 4분의 3 이상을 유럽산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EU와의 FTA 협상 타결 이후의 대책을 다각도로 수립해야 한다. 그동안 기존 무역조정지원제도와 농업에 대한 지원예산을 전면 재검토해 FTA 피해 기업과 농업인들이 필요시 구조조정 및 산업피해 지원을 신속하게 받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먼저 미국 등 다른 국가의 사례를 참고해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면서도 피해기업이 쉽게 지원받을 수 있도록 무역조정지원 신청 요건과 처리절차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지원내용은 구조조정 컨설팅 위주로 개편돼야 하고,현행 중소기업컨설팅쿠폰 대상 사업에 FTA 무역피해도 포함되도록 중소기업지원정책이 개편돼야 할 것이다.

농업의 경우 한 · 칠레 FTA 이행을 계기로 1조2000억원이 투입됐고,피해 여부와 관련 없이 매년 2000억원이 농업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눈먼 돈'이 되고 있다. 남은 예산을 한 · EU FTA 농업피해 보전에 활용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으며,다른 농업지원 예산 활용 및 추가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U와의 FTA 협정이 이행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리와는 달리 EU 측이 완전타결 선언에는 아직 유보적인 입장이고,우리 국회의 비준에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협상 타결 자체 홍보에 매달리기보다는 무리 없는 이행을 위한 내실 있는 점검과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ㆍ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