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란한 춤·노래로 ‘비디오 스타’ 시대 열어


성추행·성형수술 후유증 등 불운한 사생활



[Global Issue] 피터팬처럼 살다 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그의 노래처럼 '세계를 치유하길(Heal the World)' 바랐지만 자신의 삶도 지켜내지 못했다.



잭슨은 또 영원히 어린이처럼 살고 싶어했으나 세상과 격리된 채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혀 삶을 마감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는 잭슨의 죽음을 애도하며 "잭슨의 삶은 판타지와 비극으로 점철됐다"고 평가했다.



잭슨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음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내 동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마이클과 함께 내 정신의 일부도 날아가 버렸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 '팝의 황제'에 등극한 최초의 흑인

마이클 잭슨은 비틀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대중음악가였다.



1958년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아홉 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난 마이클 잭슨은 6살인 1964년 다른 형제들과 함께 '파이브 잭슨 보이스'를 결성, 공연을 시작해 인기를 끌자 '잭슨 파이브'로 이름을 바꿨다.



1972년 첫 솔로 앨범 '오프 더 월'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잭슨은 1982년 내놓은 '스릴러'가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하면서 '팝의 황제'에 등극했다.



특히 다음 해 같은 앨범에 수록된 '빌리진'을 NBC방송에서 부르며 무대를 미끄러지 듯 휘저은 '문워크' 댄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금까지 10개 음반이 총 7억5000만장가량 판매돼 비틀스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빅 3'로 꼽힌다.



그래미상도 13차례나 받아 음악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마이클 잭슨이 팝 가수로서 유일하게 '황제'란 수식어를 얻은 이유는 그가 대중음악계 변화에 미친 영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실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작사와 작곡, 노래와 안무를 모두 직접 소화할 수 있는 최고의 싱어송 라이터로 평가받는다.



또 그의 독창적인 퍼포먼스 방식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1980년대 초반부터 '듣는 음악' 중심의 '라디오 스타' 대신 '보는 음악' 중심의 '비디오 스타' 시대를 열었다.



특히 뮤직비디오의 고전으로 꼽히는 '스릴러(Thriller)'는 1982년 당시 최초로 장편영화 제작용 35㎜ 필름으로 만들어졌고, 공동묘지에서 튀어 나온 시체들과 마이클 잭슨의 군무(群舞) 장면은 팬들에게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마이클 잭슨의 독특한 안무와 무대 퍼포먼스도 공연 방식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문워크'와 '브레이크 댄스' '팝핀' 등 현재 댄스가수 안무의 기본이 되는 다양한 춤들을 최초로 선보였다.



또 콘서트에 뮤지컬 형식을 차용, 현란한 조명효과와 다채로운 의상 변화로 입체감을 높였다.



흑인 팝 음악을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린 것도 그의 공이다.



백인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만을 틀었던 미국 24시간 음악 전문 방송 MTV가 흑인 가수로서 최초로 방영했던 뮤직비디오가 바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였다.

⊙ 불운했던 사생활

최고의 대중음악가로 명성을 쌓았지만 사생활은 불운함의 연속이었다.



잭슨은 스스로 "내 맘 속에서 나는 피터팬"이라고 말하며 영원히 어린이로 살고 싶어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최고의 목소리와 음악적 재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만 밴드연습을 할 때마다 매를 들고 옆에 지키고 있던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의 트라우마를 영원히 안고 살았다.

'피터팬 콤플렉스'에 빠져있던 잭슨은 개인 테마파크인 '네버랜드'를 짓고 어린이들을 초청해 동심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11세 소년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이들 부모와 2330만달러에 합의했으나 이 사건으로 그의 이미지는 큰 상처를 받았다.



2004년 또 한번 아동 성추행 사건에 휘말렸다.



또 색소 이상으로 피부가 하얗게 된다는 백반증 때문인지 혹은 표백수술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하얗게 바뀌었고 반복되는 성형수술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할 만큼 이상하게 변해갔다.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못했다.



36세이던 1994년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다.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의 저작권을 확보하기 위한 계약 결혼이었다는 등의 루머에 휩쓸리며 19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다.



같은 해 잭슨은 간호사 데비 로와 두 번째 결혼을 해 프린스 마이클 1세와 패리스 마이클의 아버지가 됐지만 1999년 '성격차이'를 이유로 이혼했다.



또 2002년엔 대리모를 통해 가진 셋째 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자신의 집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언론을 향해 창문 밖에서 흔들어 또 한번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엄청난 빚더미에 앉은 슈퍼스타

[Global Issue] 피터팬처럼 살다 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전 세계에 7억5000만장의 앨범을 팔며 큰 돈을 벌어들인 잭슨이지만 '네버랜드' 운영비와 사치스러운 소비습관 때문에 엄청난 빚을 떠안았다.



이달 초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잭슨이 5억달러의 빚을 지고 고민이 많았다는 측근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노래와 ATV뮤직퍼블리싱이란 회사를 통해 보유하고 있는 비틀스 노래의 저작권 가치가 10억달러에 달한다는 평가도 있다.

AP통신은 미국 워싱턴의 한 회계법인이 2007년 작성한 보고서를 입수, 잭슨은 비틀스의 음악 저작권을 가진 소니/ATV 지분, 부동산, 골동품 및 소장품을 포함해 5억6760만달러(7200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채는 3억3100만달러(4280억원)에 달해 순자산은 2억3000만달러다.



대부분의 자산이 음반저작권이나 부동산으로 묶여 있어 그가 보유한 현금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66만8000달러(8억5000만원)에 불과했다.

성추행 관련 소송비용과 지나친 소비로 그의 재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자 비틀스 노래 저작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2억달러의 대출을 받았고 급기야 지난해 11월에는 네버랜드를 자신과 부동산 투자신탁회사인 콜로니캐피털이 공동 출자한 회사에 넘겼다.

이러한 재정 압박을 해결하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자 잭슨은 다음 달 13일 영국 런던의 O2 아레나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50회 공연의 입장권 수십만장이 순식간에 매진되면서 빅히트의 조짐이 보였으나 그의 죽음으로 콘서트는 무산돼 버렸다.



공연을 기획했던 AEG라이브는 최대 4000만달러의 손실을 볼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인들에 따르면 잭슨은 한때 자신의 재산을 세 자녀와 부인에게 나눠 증여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얽히고 설킨 채무관계 때문에 그의 재산처리가 마무리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WSJ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재산을 둘러싼 새로운 드라마가 펼쳐질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1일 자녀 양육권과 재산 관련 소송을 맡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원에 제출된 2002년 작성된 마이클 잭슨의 유언장에서 잭슨은 "어머니 캐서린을 세 자녀의 후견인으로 지명하고 캐서린 잭슨이 후견인 역할을 할 수 없으면 다이애나 로스를 후견인으로 지명한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잭슨은 또 유언장에서 재산을 '마이클 잭슨 가족 신탁기금'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잭슨은 유언장에서 아버지 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두 번째 부인 데비 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길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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