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은 감각이 좀 무디다. 겨울이면 특히 그렇다. 중 · 고등학교 때 왕복 60리 길을 자전거로 통학하며 입은 동상 때문이다.

옛날 고향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처럼 오리털 점퍼나 변변한 장갑도 없었다. 배불리 먹지 못해 영양도 부실했다. 늦을세라 꼭두새벽부터 한 시간 가까이 내달려 학교에 도착할 때쯤이면 진이 빠졌다. 아침 식사라야 보리밥 한그릇이 고작이었다. 벌판에서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하루쯤 결석하고도 싶었지만,그때 등교는 나의 꿈이었다. 결국 초 · 중 · 고등학교 12년 개근의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개근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등교에 최고 가치를 뒀다. 공부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아스라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자랑스럽다. 지금이야 웬만한 이유를 대면 학교에서 결석 처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몸이 아파도 학교에 가야 출석이 인정됐다.

내가 꿈다운 꿈을 꿔 인생을 설계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법관이 되어 나처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게 꿈이었다. 법관이 꿈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데 그게 가장 적절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법관은 아니지만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직업을 선택했고,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내 꿈의 줄기는 한번도 바뀌어본 적이 없다. 공사 사장이 돼서도 저소득층의 전기 안전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강화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는 등교처럼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꿈이기에 온 몸을 던져 그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일단 꿈이 정해지면 사물을 보는 눈도 꿈만큼 크거나 작아진다. 항상 그 꿈이 잣대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다. 꿈이 없으면 공부 자체도 목표성을 잃고,삶의 동인도 없어진다. 인생 전체도 동력을 잃고 망망한 대해를 표류하는 배와 다를 바 없다. 그런 배는 온전한 궤적을 그릴 수도 없고,남에게 낭비하지 않는 삶의 길을 보여줄 수도 없다.

그러나 직업 자체에 꿈의 지향점을 두라는 말은 아니다. 의사나 변호사라는 직업은 꿈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슈바이처는 의사이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아프리가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꿈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다. 아주 다양한 직업이 나올 수 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맞추기 위해 직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꿈을 갖더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꿈을 꿔야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분출되고 삶이 풍요로워진다. 청소년들이여 꿈을 꾸자.

임인배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riminbae@kesc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