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꼽으라면 피란 시절과 후암동 시절이다. 가장 힘든 시기였고,가장 일을 많이 했던 시기다. 하지만 다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일을 한번 더 해보고 싶다. "(고(故) 서성환 회장)

"아버지의 그 시절이 내게는 90년대였다. 366일을 일했다. 다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서경배 사장 · 아모레퍼시픽 사사(社史) '미의 여정 샘,내,강,바다' 중에서)

국내에서 성공한 2세 경영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46).서 사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선친인 서성환 회장이다. 두 사람은 흡사 사사 제목처럼 '샘이 내로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로 연결'되듯 대를 이어 회사를 세계적인 뷰티기업으로 키워왔다.


◆개성상인의 후예

대표적 개성상인인 서 회장은 '한우물만 판다'는 개성상인의 덕목에 따라 평생 화장품 사업에 전념했다. 그러나 1980~1990년대 재계에 유행병처럼 번진 사업다각화의 덫에 걸려 태평양(옛 아모레퍼시픽)도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는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서 사장이었다. 199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기획조정실 사장을 맡아 태평양 돌핀스 야구단,태평양패션,여자 농구단,태평양증권,태평양생명 등을 매각하는 지난한 구조조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서 사장이 당시 구조조정을 성공리에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결국 서 회장으로부터 배운 개성상인의 정신."그때 아버님께서는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늘 물으셨죠.그러고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

서 사장은 1990년대 위기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미와 건강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아모레퍼시픽의 존재 이유를 재확인한다고 한다. 1997년 사장 취임 당시 5000억원 수준이던 매출은 현재 1조5000억원으로 12년 만에 3배로 불었다. 특히 서 사장이 각별한 애착을 갖고 있는 '설화수'는 단일 브랜드로 지난해 매출 5000억원을 돌파,화장품 업계의 '신화'가 됐다.

◆책 선물로 직원들과 소통

서 사장은 '독서광'으로도 유명하다. 화장품회사 직원처럼 유행에 민감한 '트렌드 헌터'가 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경영서는 물론 역사,철학 서적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독서를 한다. 책을 읽다 직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싶으면 대량으로 사서 나눠준다.

평소 말을 아끼는 대신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책의 메시지로 갈음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모레퍼시픽 직원들의 책상엔 늘 책들이 가득하다. 일주일에 한 권 읽기도 만만치 않은데 서 사장으로부터 받는 책만 2~3권이 넘다 보니 버거울 때도 있다고 한다.

'제7의 감각:전략적 직관'(윌리엄 더건),'생각이 차이를 만든다'(로저 마틴),'상식 밖의 경제학'(댄 애리얼리) 등은 최근 그가 직원들에게 선물한 책들이다. 또 한 달에 한 번 유명 도서의 저자,여성 탐험가,공연기획자 등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직원들을 위한 강좌도 연다.

◆몸에 밴 '레이디 퍼스트' 정신

아모레퍼시픽은 여직원 비율이 60%에 육박한다. 국내 100대 기업 중 여직원 비율이 가장 높다. 서 사장에게는 회사는 물론 가정에서도 주변은 온통 '여자'뿐이다. 신춘호 농심 회장의 막내 딸인 부인 신윤경씨와 사이에서도 딸만 둘을 뒀다. 그러다 보니 '레이디 퍼스트' 정신이 몸에 익었다.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여직원을 만나면 자연스레 먼저 타게 하고,짐도 들어준다.

서 사장의 레이디 퍼스트 정신은 조직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모레퍼시픽은 호칭에서 직급을 뺐다. 임원에서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를 '○○○님'으로만 부르는 것도 여직원들에 대한 서 사장의 배려로 꼽힌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그는 '정진(精進)'이란 말을 좋아한다. 급격한 변화보다는 꾸준히 진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서 사장은 취임 후 지난 12년간 단 네 차례 공식 기자간담회 자리만 참석했을 정도로 언론에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은둔형 CEO'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달의 3분의 1 이상 국내외 출장으로 곳곳을 누비며 고객의 최접점인 경영현장에서 활동할 정도로 적극적인 경영인이다. 과거 태평양의 첫 수출 지역은 에티오피아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프리카 속담 하나를 유독 강조한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아모레퍼시픽은 화장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파는 회사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런 취지에서 나눔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한국유방건강재단과 유방암 예방을 위한 '핑크리본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을 비롯 '어머니 가정 홀로서기 도우미 희망가게''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 등 여성들과 함께 하는 나눔활동에 아낌없는 지원을 쏟고 있다. 이들은 모두 2003년 작고한 서 회장 시절부터 힘쓰고 있는 사업이다.

안상미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