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퍼뜨린 '사랑과 나눔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가 빠르다. 장기 기증을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

정부 부처 군부대 학교 등 단체는 물론 인터넷으로 장기 기증을 약속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다 보니 바빠진 것이 장기기증운동 캠페인을 전개하는 민간단체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다.

이 단체 설립자이기도 한 박진탁 본부장(73 · 목사)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모처럼 조성된 장기기증운동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열심이다.

박 본부장은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이왕 온 김에 장기 기증 서약서를 쓰고 가라"고 '강권'한다. 갑작스러운 권유에 당황한 빛을 띠자 "왜요? 두 번 죽을까봐서요?"라며 껄껄 웃는다.

그는 "우리나라의 장기 기증 서약자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은 장기 기증을 하면 두 번 죽는 격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그렇지만 장기 기증은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장기 기증 서약서에 결국 서명하자 그는 "좋은 일에 동참해서 뿌듯하시죠?"라며 다시 한번 웃는다. 헌혈과 장기기증운동에 40년을 몸바친 사람다운 철학과 흡인력이 그대로 묻어났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 과천 정부청사에 다녀왔어요. 15개 정부 부처에 공문을 돌렸거든요. 장기기증 캠페인에 동참해 주십사 하고요. 목이 쉬어라 설득한 보람이 있었는지 보건복지가족부,외교통상부,행정안전부,문화체육관광부,법무부,국토해양부 등 많은 부처들이 뜻을 같이했습니다. "

▼장기기증운동본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

"1991년에 설립한 국내 최대 장기기증운동 단체입니다. 생존 때 건강한 장기를 나눠 주거나,죽으면 더 이상 필요없는 장기를 기증해 소중한 생명을 살리자는 취지로 출발했습니다. 주 사업은 장기 기증에 대한 캠페인을 벌이는 동시에 장기 기증 희망을 받아서 수요자에게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혀 등록한 사람이 35만여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후 각막을 기증하셨는데요. 각막 기증이란 무엇인가요.

"각막 기증은 반드시 사후에만 가능합니다. 사망 후 6시간 이내에 적출해야 하고요. 사후에 바로 연락을 주시면 안과의사가 달려가 각막을 적출합니다. 간단해서 15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근시,원시,난시,색맹에 관계없이 생후 15개월부터 98세까지라면 누구나 다 기증할 수 있습니다. "

▼의외로 간단한데요. 그렇다면 각막이 필요한 사람들은 상당한 수혜를 볼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각막은 언제 적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사후 6시간 뒤에 의사가 도착하면 훌륭한 뜻도 쓸모없습니다. 의사가 24시간 대기하는 체제가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고인의 아름다운 뜻을 잘 받들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

▼이를 총괄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그렇습니다. 일종의 '아이 뱅크(eye bank)' 같은 기관의 설립이 시급합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24시간 대기하며 언제 어느 곳이라도 빨리 달려가 각막을 적출할 수 있도록 말이죠.미국은 18개 아이뱅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이 뱅크 1곳당 20명의 의사가 3교대로 근무하고 있죠."

▼각막 기증 말고 다른 장기 기증은 무엇이 있습니까.

"신장 기증이 있습니다. 신장(콩팥)은 등쪽에 위치한 주먹만한 크기의 장기인데요. 우리 몸에는 신장이 두 개 있어 한 개를 기증해도 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만성 신부전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신장을 기증하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

▼본부장님이 국내 최초의 신장 기증자인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1991년 장기기증운동본부를 만들고 3일 만에 신장을 기증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무런 연고 없는 사람에게 신장을 기증한 첫 사례였습니다. 그 후 신장이 하나 없어도 불편이 없구나 하는 인식이 확산됐습니다. "

▼뇌사에 빠질 경우 장기 기증을 하는 사례도 많은데요.

"물론입니다. 뇌사 때 장기를 기증하면 심장,간장,췌장,폐장 2개,신장 2개,각막 2개를 통해 무려 9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

▼장기를 기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기기증운동본부에 등록만 하면 되나요.

"아닙니다. 반드시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해요. 사실 10명이 등록하면 실제로 기증하는 사람은 1명꼴입니다. 기증률이 10%인 셈이죠.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미친 짓 하지 말라'며 가족들에게 붙들려 나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

▼외국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살아 있을 때의 장기 기증은 뒤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후 장기 기증은 아주 뒤처져 있습니다.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을 한 사람들의 비율이 일본은 12%,미국은 35%에 달하는데 우리는 고작 1%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

▼상당히 저조한데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두 번 죽는 꼴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아울러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을 제고할 수 있는 행정적 · 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

▼장기를 주겠다는 사람은 적고 받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이를 연결하는 과정도 어려울 듯 한데요. 나름대로 원칙을 갖고 계십니까.

"물론이지요. 이미 정해진 원칙을 통해 아주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끼리 주고받겠다고 한 경우가 1순위이고 가족이 없으면 2순위,받기만 하겠다고 하면 3순위입니다. 만약 신장을 기증받았으나 이상이 생겼다면 0순위입니다. "

▼장기 기증은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상당히 줄인다는 분석도 있다면서요

"고혈압,당뇨 등 성인병 증가로 인해 신장 기능을 상실한 만성 신부전 환자가 2006년 8만6249명,2007년 9만4687명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만성 신부전 환자의 유일한 치료 방법은 신장이식 수술입니다. 2007년 한 해 동안 혈액투석으로 환자 1인당 평균 1800만원의 요양급여 비용이 나갔습니다. 본부가 생긴 후 2007년까지 신장이식을 받은 환자는 875명으로 투석비용 126억원,누적으로는 1조4000억원이 넘는 건강보험 의료요양 비용을 절감했어요. 장기 기증을 많이 할수록 건강보험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

▼장기기증운동을 해오면서 가슴 벅차고 보람을 느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6가족 12명이 신장을 릴레이로 이식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또 생면부지 타인에게 신장을 기증한 남편을 본 부인이 다른 이에게 장기 기증을 하는 것을 보고는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장기 기증 장면을 본 아버지가 '부끄럽다'며 동참한 경우도 있었고요. 장기 기증을 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뿌듯하고 기분 좋다네요. "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주 간단합니다. 홈페이지(www.donor.or.kr)나 전화(1588-1589)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한 번뿐인 인생,좋은 일 좀 해보자고요. "

하영춘/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 약력
△1936년 전북 완주 출생 △1963년 한국신학대 선교학과 졸업 △1968년 한국헌혈협회 창립 △1971년 헌혈의 집 개원 △1991년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창립 △창립 3일 만에 신장 기증 △1995년 사랑의 각막은행 창립 △2007년 제주 라파의집 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