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서울대 교수ㆍ정치학>

2009년 새해를 맞는 마음이 편치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처럼,새해가 왔지만 새해가 온 것 같은 느낌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경제위기가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연초의 국회가 보여주는 비열한 모습이 연말에 이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년은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일 하나만 빼놓고서는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가 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실감한 해였다. 상반된 이념과 주장이 서로 부딪치면서 일년 내내 파열음을 일으켰으니,좌파정권 10년 만에 우파의 집권으로 부각된 변화의 필요성과 좌파의 열패감이 충돌한 탓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구성원들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별'만을 없애는 것으로 족하다.

그럼에도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민주사회에서 정치는 '파당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고,그 단적인 사례가 정당이다. 정당을 의미하는 영어의 party란 로마에서 기원한 pars,즉 '부분'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는 아니다.

문제는 정치를 파당적인 것만으로 이해할 때 공동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정부와 여당이 표방하거나 추구하는 거의 모든 정책들이 정치공동체 내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일부는 이익,일부는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파적 선'을 옹호하고 '공동선'의 개념을 불신하게 만들기는 쉽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공동선'이 개별적인 이익과 손실의 범주로만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법안마다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과 혼란이 격화되는 이유도 공동선이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오도된 인식 때문이다.

미디어법만 하더라도 신문사에만 이익이 되고 방송사에는 손해가 되며,금산분리 완화정책도 대기업에만 이익이 되고 중소기업에는 손해가 되며,시위 중 복면을 쓰지 못하게 하자는 법안,시위피해에 대한 집단소송을 뒷받침하자는 법안,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하자는 법안도 우파보수에만 이익이 되고 좌파진보에는 손해가 된다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문사 대 방송사의 이익,부자 대 서민의 이익,시위대 대 일반시민들의 이익에는 대립만 있을 뿐 양자가 같이할 수 있는 '공동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로섬(zero-sum)'의 논리로 접근되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넌제로섬(non-zero-sum)'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풍차를 향해 무모하게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사람들로부터 비아냥을 받는다.

그러나 정치에서 공동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공자가 이해한 정치에서 '바를 정(正)자' 공동선의 개념이 본질이었다면,로마의 키케로가 설파한 공적 일을 의미하는 '레스 푸브리카(res publica)' 개념에도 공동선의 비전이 두드러졌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최소공배수와 같은 공동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엄숙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나와 너 사이에 차이점만 있고 공통점은 없다면,싸움으로 밤낮을 지새는 거추장스러운 공동체를 해체하는 편이 낫지 항해하는 배처럼 같은 공동운명체로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파당적 선이 아닌 공동선을 위해 몸을 던질 것인가. 우리는 그런 정치인을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