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말 "사장 승진을 축하한다"는 여러 통의 메일을 받았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붙잡는 한통의 메일이 있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한 때 미국을 대표하는 전자업체였던 제니스(Zenith)의 구매담당 임원 프레스톤. 요즘 젊은이들에게 제니스라는 회사는 다소 낯설겠지만 50대 이상의 한국 사람에게는 선망의 브랜드였다. 20여년 전만 해도 번개모양의 상표가 새겨진 제니스의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위에서 많은 부러움을 샀다. 내가 프레스톤을 처음 만난 것은 74년 LG전자에 막 입사했을 때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한.미 연합사에서 정보장교로 군 복무를 했던 이유로 오디오 수출1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우리나라가 수출입국을 기치로 내걸고 전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외화획득에 발벗고 나선 시기였다. 이 때만 해도 제니스는 LG전자(금성사)의 20배쯤 되는 규모의 초우량 기업이었고 LG전자는 그런 제니스에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는 조그만 회사에 불과했다. 세계적인 기업의 구매담당 임원과 동양의 작은 나라,더구나 이름도 잘 모르는 회사에서 만드는 중저가 전자제품 수출을 담당하는 담당자와의 만남은(물론 미팅의 상대가 나는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어떠한 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스톤은 구매 상담차 한국을 방문했고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그를 의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팅장소에 승용차가 도착하자 나는 그가 내릴 수 있도록 뒷자리의 문을 열어 예를 표시하고 가방을 들어 안내를 했다. 당시 내 위치는 정말 별볼일 없었다. 그는 내게 눈길조차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가장 인기가 높은 부서인 수출과에 발령받아 나름대로 자부심이 컸던 나로서는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당신을 꼭 이기고야 말테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LG전자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지만 제니스는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엔 파산직전까지 몰리게 됐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제니스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LG전자는 고심끝에 결국 제니스를 인수키로 결정했다. 95년 나는 제니스 대주주인 LG전자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제니스 이사회에 참석해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이사회 멤버가 아닌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직위에 있었다. 20여년만에 우리 둘의 입장이 바뀐 것이다. 그 순간 20여년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나는 가슴 가득한 자부심을 느꼈다. 당시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의 성공사례가 하나씩 늘어가고 "나도 할 수 있다.우리의 목표는 더 먼 곳에 있다"는 자신감이 실력과 맞물려 가면서 몇년 전만 해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의 축하 메일을 받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다가 예로부터 "큰 성공에는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가 함께 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겼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전자산업 분야는 사업 환경의 전반적인 모습이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다양하고 새로운 사업기회가 생겨나는 천시에 놓여져 있다. 세계 최강이던 일본의 전자산업은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발전의 속도가 정체되어 있는 가운데 한국의 전자산업은 엄청난 기세로 추격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세계 일류와는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더군다나 중국의 전자산업에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부적으로 경쟁 역량을 갖추어 가면서 밖으로는 겸손과 친절 교양을 갖춘 인화를 바탕으로 천시와 지리를 잘 활용한다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일도 결국엔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