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梅泉野錄)'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서구식 결혼식을 올린 사람은 유길준(兪吉濬)의 아우 유성준(兪成濬)이었다고 한다. 그 해가 1907년이었다. 하지만 전통유학자로서 개화기 인사들의 행태를 사소한 일까지 비판한 매천 황현(黃玹)도 그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있다. 구식 결혼이 많았던 광복전 도시에선 떡집에 주문을 해 갖가지 빛깔로 물들인 색떡을 둥글고 큰 놋그릇인 '밥소라'에 30㎝쯤 되는 높이로 쌓아 보냈다. 갖가지 색으로 물들인 떡으로 만든 꽃 새 노리개 등을 꼬챙이에 꿰어 장식해 요즘의 결혼케이크만큼이나 화려했다. 보내온 색떡은 대청에 죽 늘어 놓아 화환 구실도 했다. 색떡 한 밥소라면 큰 부조가 되고 국수 한 채반을 보내면 됐지 돈을 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런 상부상조의 정신은 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미풍양속이다. 급격한 사회변화로 전통적 상호부조정신이 많이 사라져 버렸으나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경조사부조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돈으로 하는 부조에는 문제가 있다. 결혼식의 경우 시대의 조류인지는 몰라도 점차 호화로워져 혼주의 체면치레와 과시욕 때문에 하객을 끌어모으는 허례허식의 낭비문화가 만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이 결혼식 관련비용을 조사했더니 한 쌍의 예식비와 피로연비는 97년보다 40% 늘어난 8백83만원으로 껑충 뛰었다고 한다. 또 축의금의 경우 친척은 거의 배가 증가한 10만5천원,친구는 28% 늘어난 4만7천원이었다. 청첩장을 받으면 축의금이라도 전해야 실례를 면할 수 있는 것처럼 돼버린 것이 우리 사회다. 예절이란 본래 존경 축하 감사 등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형식일 뿐이다. 이 마음가짐의 내용은 사라지고 그것을 담았던 껍데기만 남은 꼴이다. 풍속은 '상풍하속(上風下俗)'이라 했다.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호화결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혼식은 다시 가족중심으로 바뀔 때가 됐다. '부조는 하지 않더라도 잔칫상은 치지 말라'면 할 말이 없지만. 고광직 논설위원 kj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