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회장(63)이 지난 22일 밤 한국을 방문했다. 루빈 회장은 23일 아침 진념 부총리를 만나 한국과의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등 바삐 움직이고 있다. 주식과 채권거래에서의 탁월한 실적으로 '월가의 전설'로 통했던 그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가경제회의(NEC) 의장과 재무장관을 거치며 90년대 미국경제를 유례없는 장기호황의 반석 위에 올려 놓았던 주역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의 금융그룹인 씨티그룹의 지휘탑을 맡고 있는 루빈 회장을 알아본다. "어떤 회사도 루빈같은 사람을 보내면서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92년 12월 당시 루빈과 함께 골드만삭스 공동회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프리드먼이 그를 떠나 보내며 남긴 고백이다. 골드만삭스를 세계 정상의 투자은행으로 키워낸 주역을 백악관으로 보내야만 하는 아쉬움이 짙게 묻어있다. 가정을 위해 재무장관직을 떠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던 루빈 회장은 지난 99년 가을 세계 1백여개국에 1억명 이상의 고객을 가진 씨티그룹의 공동회장으로 취임했다. 그가 제2의 고향인 월가로 화려하게 컴백했던 것이다. 그 당시 씨티그룹은 보험 중심의 트래블러스와 은행인 씨티코프가 손을 잡은 후 불협화음과 악성루머에 시달렸었다. 씨티로선 루빈과 같은 든든한 경영자를 얻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 루빈이 월가와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지난 66년 골드만삭스에 입사하면서부터다. 하버드대와 예일대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2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던 그는 사실 월가에 첫 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금융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명석한 두뇌와 타고난 친밀감을 지닌 루빈 회장은 기대이상의 뛰어난 실적을 보이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입사 5년 후 파트너에 오르고 14년 만에 경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90년 그는 골드만삭스 회장직을 맡으면서 금융인으로선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골드만삭스 시절 그는 주식과 채권투자에서 10년 연속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투자의 귀재'로 평가받았다. 92년 한햇동안만 2천6백만달러의 소득을 올려 갑부의 대열에 동참했다. 백만장자인 그는 그러나 일상에서 전혀 티를 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로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첨예하게 의견이 대립하는 백악관에서 매끄럽게 장관직을 수행해 낸 것도 이러한 친화력있는 성격 덕분이란 평이다. 루빈이 지휘봉을 잡은 90년대 초반 골드만삭스는 순항을 거듭했었다. 지난 93년 금융전문잡지인 유로머니가 발표한 투자은행 업무 10개 분야에 대한 등급결과에서도 이는 잘 나타난다. 골드만삭스는 전세계 투자은행 중 유일하게 전 분야에서 5위 안에 들었다. 종합순위에서도 2위인 메릴린치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루빈 회장은 그 당시 클린턴 행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악관으로 둥지를 옮겼다. NEC 의장과 재무장관을 거치는 동안 루빈이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강한 달러'와 '시장 우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달러화 강세와 개방주의를 앞세워 미국이 높은 성장률과 낮은 물가수준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90년대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설명하는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의 초석을 다진 셈이다. 강한 달러정책은 해외의 값싼 자금을 월가로 끌어들여 미국경제가 장기간 호황을 지속할 수 있는 초석이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월가에서 익힌 외국인투자자에 대한 생리를 경제정책에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루빈이 재무장관을 맡았던 시절(1995∼99년) 세계 금융시장은 요동의 연속이었다. 멕시코 페소화위기, 아시아 금융위기, 러시아의 대외채무동결 등이 연이어 터지며 세계경제에 불안감이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루빈은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인물인가, 수습한 인물인가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어쨌든 세계 금융위기를 잠재우는데 성공한 덕분에 99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루빈을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로렌스 서머스(당시 재무부장관) 등과 함께 '세계를 구한 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그의 퇴임 때 클린턴 대통령도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 이후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루빈을 추켜세웠다. 95년 재무장관 취임 때 4천포인트였던 다우지수는 꾸준히 올라 그가 사임을 발표한 99년 5월에는 1만1천포인트까지 상승했다. 그의 업적은 시장에서 증명됐다. 그러나 시장주의와 개방을 강조한 그의 정책은 개발도상국에는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때문에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특히 강한 달러를 입에 담을 때마다 엔화가치가 속수무책 떨어지기만 했던 일본으로서는 루빈 회장이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는 개도국에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재무장관 퇴임시 가진 기자회견에서 루빈은 "미국경제가 둔화될沽?대비해 각국은 강력한 경기부양책을 미리 마련해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경제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경고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이 효과가 없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는 'IMF의 결정이 옳았다'고 IMF 무용론을 일축하기도 했다. 현재 샌포드 웨일 회장과 씨티그룹 공동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일상업무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룹의 경영전략과 기업운영 방향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만 참여하고 있다. 재무장관 출신인 만큼 정부관련 사업 등 대외업무 조정을 총괄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그룹 자회사간의 의견조율도 그의 중요한 몫이라는게 씨티측의 설명이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 ------------------------------------------------------------------ [ 약력 ] 1938년 미국 뉴욕 출생 하버드대.예일대.런던경제대학 졸업 1966년 골드만삭스 입사 1990년 골드만삭스 공동회장 1993년 미국 국가경제회의(NEC) 보좌관.의장 1995년 미국 재무장관 1999년 씨티그룹 공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