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투신운용의 백경호 사장은 21일 오후 일정을 모두 비웠다.

시급한 약속들은 다음날로 연기했다.

''금융기관 최고경영자(CEO) 연찬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1백50여명의 다른 금융회사 CEO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금융기관의 소프트웨어 개혁''.

퇴출이나 인수합병(M&A) 등으로 외형적인 금융 구조조정은 어느정도 마무리됐으니 이제부터는 내부개혁, 이른바 소프트웨어 개혁에 주력하라고 정부가 당부하는 자리였다.

진념 부총리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개.폐회사를 통해 "소프트웨어 개혁을 위해서는 CEO들의 마인드(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강연과 주제발표, 토론이 벌어진 3시간반 동안 강당을 가득 메운 CEO들은 묵묵히 얘기만 들었다.

질문도 거의 없었다.

오후 7시께 저녁 식사가 시작되고 테이블마다 술이 2∼3잔씩 돌자 무겁게 닫혀 있던 입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 증권사 사장은 "바쁜 사람들 모아놓고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수익을 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고 기업대출 문제도 정부 당국자의 말보다는 현장에서 뛰는 자신들이 더 잘아서 판단하는데 꼭 이런 자리가 필요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옆에 있던 종금사 사장이 말을 받았다.

"한자리에 모아놓고 얘기하는걸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관료들의 속성 아니냐"

폭탄주로 얼굴이 불콰해진 한 시중은행장도 거들었다.

"사실 수익성 수익성하지만(정부에서 청탁) 전화만 안해도 할만 한 것 아니냐"

정부 간섭이 문제라는 얘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한 참석자도 만찬장을 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은행을 공공기관이 아니라 ''금융회사''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모임명칭은 아직도 ''금융기관'' CEO 연찬회"라며 "정작 필요한 것은 정부 당국자들의 소프트웨어(인식) 개혁이 아니냐"

만찬장은 정부 당국자들의 관료주의적 발상을 척결하는게 더 시급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박수진 경제부 기자 park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