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비평이란 작품이나 연주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분석해 장단점을 제시함으로써 예술가를 자극,격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엔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된 비평이 없다는 소리가 높다.

학연 지연으로 인한 붕당주의와 상업주의때문에 정실비평내지 인상비평만 판친다는 말도 많다.

실제로 문학이나 미술작품 연주평 모두 장단점이나 보완점을 지적하는 엄격함보다 의례적인 수사와 칭찬 일색인 것투성이다.

그 결과 한국의 문학 음악 미술 평론은 독자나 청중 관람객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렇게 된 원인엔 논쟁을 싫어하는 평론가들의 태도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소한 비판도 못 받아들이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예술가들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들 한다.

워낙 판이 좁아 뻔히 알기 일쑤인데 조금만 싫은 소리를 해도 원수로 아니 찬사만 늘어놓거나 정히 못마땅하면 언급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풍토가 만연됐다는 얘기다.

러시아 출신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지난해 봄 러시아평론가들의 혹평에 반발,더이상 러시아에서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데서 볼수 있듯 비판에 대범할수 있는 예술가는 드물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1887~1982)는 열한살때 베를린필하모니와 협연할 정도였지만 미국에서의 첫데뷔 연주는 "너무 메말라 있다.

앞으로 최소 5년은 인간적 고뇌를 느껴야 할 것이다"라는 혹평을 받았다.

서른살이 넘어한 재도전에서도 여전히 악평을 들었다.

그가 미국에서 인정받은 건 쉰살때 뉴욕필하모니와 연주하고 난 뒤였다.

바이얼리니스트의 연주에 대한 대기업 명예회장의 평때문에 벌어진 논란이 끝내 법정소송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소식이다.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음악인과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벌어진 일치곤 상식을 벗어난 감이 짙다.

연주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생각할수 있었을 것이고 기업쪽 또한 자존심강한 예술가들의 특성을 고려,조금만 신중히 처리했다면 일이 이처럼 확대되지만 않았을 것이다.

모쪼록 슬기롭게 처리되기를 바라거니와 이번 일때문에 기업의 음악 지원사업이 위축되지 않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