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잔치에 갔다가 우연히 "멀레"라는 사람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돌잔치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술을 한잔 하자 그들은 숫제 초등학생 아이들처럼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동창 하나가 생각난 듯 "너 혹시, 멀레라고 생각나냐"라고 물었다.

희한한 별명 때문인지 모두 금방 그를 기억해냈다.

기억 속의 멀레는 별명에 걸맞게 늘 입을 반쯤 벌리고 웃는 조금은 멍한
아이였다.

한 친구가 우연히 대학병원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 멀레를 보았다는 것이다.

멀레가 왜 그 병원에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멀레는 그 병원의 전문의였다.

동창들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친구는 멀레의 달라진 모습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멀레는 우리가 알던 예전의 멀레가 아니야.

갑자기 동창들이 숙연해졌다.

멀레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던 동창이 나섰다.

체육시간에 한 아이가 철봉에서 떨어졌는데 모두들 팔이 부러졌다고 난리가
났었어.

그런데 멀레가 나서더니 그 친구의 팔을 끼워맞췄지.

친구들의 놀림을 받던 멀레는 달라지고 있었다.

멀레는 특히 인체 기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것을 유심히 본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갔다가 돌아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동창이 말했다.

다 바뀌었지만 한 가지 안 바뀐 게 있더라구.

허, 하고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예전의 멀레인거야, 멀레.

"정말 드라마 같아. 그런데 우린 정작 멀레의 이름조차 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씁쓸하게 말했다.

혹시 배가 아픈 거야?

나는 너무도 직설적이었다.

멀레라고 불린 그 남자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우리를 쏘삭거렸다.

나는 마흔이 되어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아주머니를 알고 있고 또 예순이 되어 중학교 검정고시부터 시작해 대학에
입학한 할머니도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내 자신을 향해 일침을 놓았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