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쌍용의 미국 현지법인인 쌍용 아메리카는 최근 위생용품을 만드는
국내의 한 중소기업으로부터 미국내 수출선 발굴 요청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불가" 통지를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장을 개척하는데 쓸 "실탄"이 바닥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 업체가 요청한 수도꼭지 등의 현지판매 체제를 갖추려면 최소한 1백만-
2백만달러는 필요하다는게 쌍용 측의 판단이다.

일정량의 재고를 확보(stock sale)하고 세일즈 전문요원 등을 채용하는
등 초기투자에만 그정도의 돈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여파로 현지의 자금 줄이 대부분 막혀버린 상황이어서
1백만달러는 이제 "거금"이 돼버렸다.

이 회사의 정찬웅 이사(법인장)는 "예전 같으면 신규알선 건수가 생기는
즉시 시장조사에 착수해 거래를 성사시켰다"며 "하지만 지금은 가용재원부터
파악하는게 순서가 돼 버렸다"고 말한다.

수출감소로 국내경제에 초비상이 걸린 가운데 대미 수출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종합상사들이 이처럼 하나 둘씩 기능마비 상태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새 시장 개척이 완전 중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존 거래선들을 털어내는 경우까지도 생겨나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의 종합상사 현지법인들은 신발 의류 등 생활용품 수출영업을 사실상
정리한 상태다.

품목 특성상 재고를 쌓아놓고 영업을 해야 하는데 재고를 유지할 만큼의
자금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 이사는 "구매자 시장(buyers" market)인 미국에서 물건을 팔려면 바이어
에 대한 수입신용장 지원에서부터 통관 운송 보험 등 대부분의 비용을
수출업체 측에서 책임져야 한다"며 "자금능력이 선결요건인 미국 시장에서
과거와 같은 수출 영업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됐다"고 호소했다.

무두가 마찬가지다.

현대 아메리카는 올해 현지매출이 작년(5억달러)의 60%인 3억달러를 달성
하면 "성공"이라고 보고 있다.

금융비상 체제에 돌입하면서 수익이 낮은 사업을 대폭 정리한 탓이다.

한창 때 연간 1억5천만달러까지 매출을 안겨줬던 선박 벙커링(주유 대행업)
을 비롯, 원료 고철 등의 3국간 거래도 중단했다.

한국과 미국간의 금리차를 이용해 이런 사업을 해왔지만 미국내 조달금리가
연 12-13%를 넘나드는 상황이 돼 더이상 버틸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이 회사의 이종일 재무담당 부장은 "당분간은 철강 등 그나마 경쟁력을
갖고 있는 품목에 가용재원을 총투입할 방침"이라며 "금융기능이 마비된
지금 상황에서 영업 볼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얼마나 버텨내느냐가
과제"라고 말했다.

삼성 아메리카 측도 "외형보다는 내실"이라는 말로 요즘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 회사의 강진경 부장은 "저수익 사업을 대폭 정리함에 따라 올 현지매출
은 작년(13억달러)보다 1억-2억달러 정도 감소가 불가피할 전망"이라며
"자체 의류 브랜드인 후부(FUBU)의 매출과 순익이 기대이상의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이외에는 고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LG 아메리카도 사정은 비슷하다.

김영섭 부장은 "대미 수출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중남미 등지와 3국간
거래를 늘리고 있다"며 "전체적으로는 작년 수준의 매출(10억달러)을 달성할
수 있겠지만 대미 수출만 놓고 본다면 대폭 감소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수출 입국"의 주역을 자임해 온 대형 종합상사들이 이 정도니 다른
수출업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은행들은 물론 미국계 은행까지도 한국 종합상사들에 대한 신용장
개설을 주저하는 분위기가 날로 확산되고 있다(윤영섭 삼성 아메리카
자금담당 차장).

한국계 은행들로부터의 차입은 사실상 중단된지 오래고 현지 은행들도
대출을 평균 40%이상 줄인 상태다(LG 김영섭 부장).

더욱이 현지 차입금리가 예금금리보다 평균 4-5%포인트 웃도는 역마진
현상까지 가세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자금을 쓰지 않는 지경이다
(삼성 윤 차장).

SK 아메리카의 김영만 부회장은 "미국시장에서 자리잡기 위해 종합상사들이
20여년 동안 기울여온 온갖 노력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며
"뒤늦게 정부가 종합상사들에게도 무역금융을 지원키로 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했다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 뉴욕=이학영 특파원 hyrhee@earthlink.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0월 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