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이 ''딥 블루''(Deep Blue)의 출현으로 시끄럽다.

IBM의 인공지능 슈퍼컴인 ''딥 블루''가 보통사람도 아닌 체스왕
카스파로프를 무너뜨렸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딥 블루''는 요즈음 각 분야에서 한창 개발되고 있는 인공지능들이 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까지 인간이 지닌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문명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이바지하지 않겠느냐는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보여
줬다는 것이 서방언론의 평가다.

그러나 서방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특히 바둑을 두는
동양권 사람들은 ''딥 블루''가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경우의 수가 2백내지 3백에 이르는 바둑에 비하면 경우의 수가 최대 64에
불과한 체스는 그야말로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비쳐지는지도 모른다.

시중에 나와 있는 컴퓨터 바둑의 실력이 겨우 10급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은 이를 극명하게 대변해준다.

하지만 자연의 우연법칙에 심각한 굴곡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홀연히
등장한 복제양 ''돌리(Dolly)''와 함께 인류문명사의 새로운 미래상을 엿보게
한 ''딥 블루''의 등장은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딥 블루''는 쉽게 생각해 고성능 마이크로프로세서(CPU)와 체스관련
데이터 베이스(Data Base)를 묶어 놓은 조합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단순한 특성이야말로 딥 블루를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그래머들이 마음만 먹으면 CPU와 데이터 베이스는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늘어난 만큼 딥 블루가 지닌 능력은 비례적으로 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딥 블루''의 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딥 블루''에 뒷걸음질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다소 기복이야 있겠지만 체스에 관한한 이제 인간이 ''딥 블루''를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체스의 종언"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성급하다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딥 블루''가 지닌 메가트렌드적 함의와 시사는 광범위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가 꼭 귀기울여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시대는 지나갔다"

너무 흔히 듣는 원론이지만 우리주변에서 이것만큼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명제도 흔하지 않다.

"소수 엘리트" 카스파로프가 "다수" 프로그래머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시장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우리 경제
사회의 시대적 요구에 더없는 힘을 실어주고 있다.

금융개혁작업이 한창 마무리단계에 이른 것같다.

이와 관련, 수많은 얘기들이 오가고 있지만 개혁의 큰 틀은 결국 "작은
정부"를 구현하자는데 맞추어져 있다.

그동안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과도한 권한을 쥐고 관치금융을 주도해 온데
따른 비효율과 불합리를 해소하고 민간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여러가지 의제들이 거론되고 있지만 금융개혁의 실천적
목표는 비대한 재경원과 한국은행의 구태의연한 인원과 조직을 축소하자는데
있다.

업무영역 구분이 모호해진 대세에 맞춰 은행 증권 보험기능을 통합하겠다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다.

이렇게 보면 최근 며칠사이 한창 논의되고 있는 금융감독위원회 신설여부
문제, 위원회에 대한 관할권 등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감독이란 필요없는 상태가 제일 좋은 것이고 보면 큰 줄기에서 볼 때
감독은 부차적인 기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속말로 감독은 몸통이라기 보다는 깃털기능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를 누가 관장하느냐를 놓고 이해당사자인
재경원과 한국은행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논리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국민들 보기에 밥그릇 싸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정책적 일관성 및 현실성, 형식적 구성요건 등에 비추어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민간, 즉 금융행위의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여 여타부문에 비해 뒤떨어진 금융산업의 효율을 높이고 그
결과로 시장의 자원배분기능을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요즈음 이해당사자간의 대치 양태를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목표인
"작은 정부"를 실현하겠다는 분위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떻게 하면 우리쪽 사람을 하나라도 더 파견할 수
있을까에 모든 이해당사자의 신경이 쏠리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최소화해야 할 위원회"가 "최대로 확대개편"될 공산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들린다.

어찌됐건 현실적으로 금융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열쇠는
결국 재경원장관의 문제인식과 의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개혁은 재경원의 의지여하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재경원장관은 취임사에서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한 의지와 국가백년대계의 입장에서 사심없이 일을 추진하다 보면
개혁은 성공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가경제력도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