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진주 실론섬.

홍차의 나라.

타밀반군(LTTE)으로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는 국가.

인도로부터 독립한 작은 섬나라..

스리랑카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이런 낯선땅 스리랑카에 8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기업들이 하나 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스키장갑을 생산하는 "구상무역"도 그중 하나였다.

당시 "스리랑카항"에 조그만 나룻배로 도착한 "구상호"는 이제 커다란
범선으로 탈바꿈하여 전세계를 누비고 있다.

항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구슬땀을 흘리며 험한 파도를
헤쳐온 "구상호"의 함종구"선장".

그가 바로 현지인 "오합지졸"들을 그러모아 구상무역의 스리랑카 지사인
"구상랑카호"를 건조하고 출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패기와 열정으로 현지인들을 감복시켜 훌륭한 "뱃사람"(근로자)으로
키워 냈고 끈질긴 집념으로 침몰 위기의 "구상호"를 추스려 오늘의 성공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스리랑카에 진출한 대부분의 우리 기업들처럼 당시 구상무역도 국내 임금의
상승과 금리 물류비 부담 등으로 서울에서는 더이상 채산성을 맞출 수
없었다.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외진출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는 동안 회사는 점점 도산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몸으로 뛰고 철저한 의지를 가진 중견간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때 해외사업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바로 함종구전무(당시)다.

투자적격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회사에서 정한 기준은 "저개발국이면서 정치적인 안정성도 어느정도
있고 국민성이 온순해야 한다"는 것.

고심끝에 부모중심제 가정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불교도가 70%이고
우리와 비슷한 풍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스리랑카를 목적지로 삼게 됐다.

스리랑카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국에서 심사숙고했다지만 현지 사정은 또 다른 문제였다.

현지인들은 비협조적이었고 투자청의 인가 등 절차는 복잡하기만 했다.

91년8월 드디어 공장 건축이 시작됐다.

목표는 12월 완공.

그러나 뜻대로 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스리랑카에 대규모 파업사태가 벌어진 것.

구상랑카도 노조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현지 사무직원도 문제였다.

구상랑카는 이들을 공장 건축단계부터 투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사무직도
교육수준이 낮을 뿐 아니라 노동의 경험이 없어서 한국식의 중노동에는
다들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불안했습니다. 내심 당시 대통령이던 프리마다사의 개발독재를 믿어
보려고도 했지만 제가 생각한 현실과는 너무 차이가 컸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함종구 전무는 팔을 걷어 붙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책임은 내가 진다. 지금부터는 공사도 내가 직접 한다"는 생각이었다.

현지 최고책임자라는 위치를 잊고 오직 회사를 구한다는 일념 하나로
부딪쳐 나갔다.

현장에서 4개월여를 먹고 자면서 노력한 끝에 결국 12월 말에는 벽없는
공장이나마 완공됐다.

"말이 4개월이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없던 일"로 하고 싶을 정도였읍니다"

"내가 왜 사는가. 왜 이렇게 고생하는가"하는 생각이 4개월간 수도 없이
떠올랐다.

망년회는 고사하고 가족과 함께 할 시간도 없었다.

저급 주택에 입주한 관계로 식수 등 갖가지 문제에 골치를 썩여야 했고
가족들도 참기 어려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91년 12월9일 드디어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재단기 8대, 미싱 100대, 인원 200명의 초라한 출발이었다.

그나마 구상랑카는 가동 첫달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첫월급을 당연히 규정대로 지급했음에도 불구하고 50명중 38명이 정근수당
등 출근과 관련된 급여지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나선 것.

하늘은 더이상 파랗지 않았다.

서울에서부터 머릿속에 그렸던 계획들도 더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일부는 어르고 달래서, 일부는 새로 뽑아서 겨우겨우 공장을 가동시킬 수
있었다.

스키장갑은 생각과 달리 공정도 매우 많고 세밀한 손재주를 요구하는 품목
이다.

많게는 43개의 공정을 거쳐야 하나의 완성품이 나오는게 스키장갑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현지 직공들의 수준은 우리나라 국민학교 3학년 정도.

덧셈 뺄셈도 못하는 직공들이 언제 숙련공이 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무직도 마찬가지였다.

장부기장 수불정리 재고관리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들 수준에서 600여가지 자재를 관리하는 일은 머리가 터질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

현지인의 타성과 낮은 생산성, 그리고 영어권이라고는 하지만 생산직의
대부분이 싱할리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따른 언어소통곤란 등이 함사장을
괴롭혔다.

회사규율과 전통의 확립을 위해 군대식 훈련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일체감을 형성시켜야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함사장은 매주 월요일 아침조회를 하고 작업시작전에 5분기도를 실시했다.

15가지의 회사규율을 제정하고 위반에 대한 벌칙도 두었다.

90도 인사, 군대식 거수경례 등으로 회사의 골격과 기강을 갖춰 나갔다.

군대식 훈련은 그의 집안이 군출신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북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서북청년단 단원으로 활약했고 아버지와 형님이
6.25에 참전했다 전사하셨던 것이다.

게다가 함사장 자신도 해병대 출신으로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한 경험이
있는 상이군인이었다.

첫 공정 투입후 2개월만인 92년 2월11일 드디어 첫 완성품이 햇빛을 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지붕도 없는 가건물에서 생산을 시작한지 꼭 60일만의 일이었다.

함사장은 아직도 자신의 방에 소중히 이 스키장갑을 보관하고 있다.

불량품을 줄이기 위해 "맨투맨" 작전을 실시, 재봉선이 고르지 않은 것을
수차례 교정시켰다.

이에 따라 생산성도 1인당 하루 1켤레 꼴에서 급속히 높아져 나갔다.

5월15일 첫 선적을 마친 구상호는 힘찬 항해를 시작한다.

드넓은 인도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세계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이제는 5대양 6대주를 통해 전세계 스키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금도 함종구 사장은 그 어려운 시기를 회상하면서 결연히 일어선 자신을
대견스러워 한다.

잦은 정전문제와 숱한 불량품, 그리고 오랜 기간의 영국 식민지 생활과
곧이은 사회주의 체제아래서 게으름의 타성에 젖은 현지인들.

수많은 휴일들.

납기에 대한 심한 압박감.

그 모든 역경을 헤친 뒤끝이라 이제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한다.

지금까지 구상호는 파업 한번 없는 모범기업으로서도 현지에서 평판이
자자하다.

구상을 배우려고 야단이다.

구상은 생일카드 전달은 물론 매월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사장이 직접
직원들과 면담, 고충처리와 흉사처리 등을 돌봐주고 있다.

이제 현지에 한국인 2명과 재단기 10대 재봉기 270대, 그리고 고용원
540명을 가진 "구상호".

피와 땀으로 일군 구상호의 만선을 바라보는 함사장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배어 있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