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원동 신사역부근 사조상호신용금고 빌딩.

이 곳의 수요일 오후풍경은 다른 금융기관과는 사뭇 다르다.

오후 4시반.

아직도 고객들이 올 시간이다.

그런데도 사원들이 하나 둘씩 넥타이를 벗어 던진다.

옷을 갈아 입고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문을 나선다.

퇴근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가는곳은 같은 건물 4층 강당.

6시가 되자 충정로 지점에 있던 사원들도 도착하기 시작한다.

78명의 인원이 채워지자 강당에 있던 그랜드 피아노가 가볍게 진동하며
음을 뱉어낸다.

사원들은 작은 기침으로 음을 가다듬는다.

사조신용금고 아마추어합창단 "사조코러스"팀 전용연습실.

창단 3년만에 국내정상의 아마추어합창단을 탄생시킨 산실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이곳 전용연습실은 합창단원들이 내뿜는 열기로 가득하다.

박우석과장(37)의 테너음과 입사한 지 1년도 안된 새내기 변은경씨(20)의
알토음이 멋드러지게 어우러진다.

귀에 익은 "하바나길라"부터 팝송 가곡 가요 그리고 합창의 정수인
미사곡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사람들은 "사조코러스"팀을 국내 최고의 합창단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아마추어팀중에서.

그러나 혹자는 프로 합창단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원구성이나 화음 지휘 어느 하나 뒤지는게 없다는게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

사조코러스팀이 이처럼 극찬을 받고 있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항상 생활을 같이하는 이심전심의 동료들이 호흡을 잘 맞추는데다 매주
수요일 빠짐없이 연습하기 때문이다.

또 특별히 합창단을 위해 특채된 실력있는 지휘자(김건웅씨.29)와 몇몇
음대출신 단원들도 "사조코러스"팀을 정상의 팀으로 끌어 올리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현재 "사조코러스"팀에는 사조상호신용금고의 과장급이하인 20~30대초반
사원 78명이 활동하고 있다.

150여명의 사원중 절반이 합창단원인 셈.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규모다.

그러나 사조신용금고만이 가능하다.

주진규사장(43)의 독특한 경영철학 덕택이다.

주사장은 평소 "합창팀이 싫으면 회사를 떠나라"고 말할 정도로 합창에
대해 나름대로의 신념을 갖고 있는 클래식 애호가다.

"농담이 지나치군"하고 흘려 들었다간 큰 코다친다.

"합창은 직원들의 단합과 정서함양을 위해 더할나위없이 좋은 활동"
이라는게 주사장의 생각.

주사장도 합창단에 합류한다.

바리톤이 원래 파트이지만 합창단에서는 베이스를 맡고 있다.

화음을 위해 약간의 조정을 받아들였다.

공동체생활을 위해 이해와 양보가 필요한 것은 합창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합창단이 생기고 난후 여기저기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합창단원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악보를 보며 "이제 무슨 콩나물이야"라며 시큰둥하던 사원들이
이제는 "김과장, 그 부분은 키를 조금 낮추는게 좋겠군"하며 조율하는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또 직장내에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휘파람 콧노래 사내방송 등 어디에서든지 음악을 접할 수 있다.

회사생활이 즐거워졌다는게 이들의 중론.

이제 사조코러스는 공사가 다망한 소위 "스타급" 합창단이 되었다.

정기공연이외에도 TV출연, 정부행사에 초청받기도 한다.

연말 송년의 밤 행사에도 빠지지 않는다.

앞으로는 자매합창단인 사조어머니 합창단과 연합발표회도 가질 예정이다.

사조어린이합창단도 창단, 직장인 어머니 어린이가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연합발표회도 구상중이다.

"오페라단과 음악전문학원을 만들어 기업의 이익을 음악으로 일반인에게
환원하겠다"고 주진규사장은 밝힌다.

"어 벌써 5시네. 자 다들 준비하자구"

지난 11일 수요일 저녁.

사조빌딩의 여기저기에선 상쾌한 휘파람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주 연습곡인 카펜터스의 "톱 오브 더 월드"다.

"사조코러스"팀의 하모니가 세상에 울려 퍼지기 위해 아름다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