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나의 길을 간다" 컴퓨터가 좋다.

월급쟁이는 질색이다.

대학졸업장도 나에겐 의미가 없다.

최현호(28).

삭막한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소프트웨어 업계에 열정 하나만으로
뛰어든 한 젊은이.

하루에도 몇 백명의 젊은 꿈들이 도전하고 또 그만큼 뒷길로 사라져가는
비정한 프로그래머의 세계.

그는 이 세계를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라는 간판도 내버리고.

"빌 게이츠를 꿈꾸냐고요.

한글과 컴퓨터의 이찬진사장요"

냉소어린 목소리에 약간 비웃는 표정이다.

"소프트업계에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보다 정치권에 기대려는 사람은
한물 간 것 아닌가요"

어느 시대이든 기성세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언제나 이런 젊은이의
특권이다.

"리처드 스톨만을 아세요.

이 시대 마지막 해커라고 불리는 사람"

갑자기 정보공유화를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는 리처드 스톨만을 얘기한다.

그가 꿈꾸는 것 역시 정보화 시대에 정보공유를 통한 세계 변혁.

그는 정보화시대를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 정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되레 속박하는 것을 우려한다.

정보공유화가 그의 화두다.

도스나 윈도95처럼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운영체계의 독점권을 거대한
마이크로소프트사로부터 빼앗아오자는 당찬 포부를 감추지않는다.

"빌 게이츠는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장사꾼에 불과해요.

내 꿈은 그 운영체계를 돈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소비자의
권리로 제공하는 것이죠"

과연 이런 정보공유에 대한 열정은 이들만의 꿈으로만 그칠까.

그가 이 분야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2학년때 8비트급 컴퓨터를
장만하게 되면서부터.

밤새 새로 생긴 "장난감"을 다루면서 친근감을 느끼게된 것이다.

이런 그가 프로그래머의 꿈을 품고 88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민중의 정치적 욕구가 불타올랐던 80년대 후반기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도서관의 안락한 자리를 고집할수 없게했다.

정치적으로 급박했고 이념적으로 급진적이었던 시대.

자연스럽게 학과공부와는 멀어지게된 시절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웠던 시기였고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내심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한다.

그가 다시 컴퓨터를 만난 것은 92년 군에 입대하고 나서부터.

전산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공병지휘통제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
육군이 주최한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2등상을 받아냈다.

부대내에 있던 유일한 8비트 XT급 컴퓨터 한대를 갖고.

94년 8월에 제대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복학해 졸업장을 받을 것인가, "나만의 길"을 걸을 것인가.

"졸업장을 받는다고 달라질게 있겠어요"

결국 서울대 전자공학과라는 어쩌면 "보장된 삶"을 마다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다.

"한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스스로 차린 것.

그가 내민 명함에는 조그맣게 실장이라는 직책이 적혀있다.

대표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고 사장이라고 쓰기에는 너무 건방져 보일까봐
고심끝에 택했다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은 개별회사로부터 소프트웨어프로그램 용역을 맡아
개발하는 일.

주로 중소기업의 업무전산화요구가 많다.

회사마다 업무처리방식이 다르니 각 회사의 특성에 맞게 프로그램을
짜야한다.

작업 초기에는 매일 고객회사로 출근해 업무흐름을 파악한다.

이러다보니 그 회사의 내부 실속을 오히려 실무자보다 잘 알게된다.

"조금만 손을 보면 편리하게 일할수 있는데.

언젠가는 업무표준화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에요"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거의 밤새워 일하는 게 일상생활이 됐다.

양재동에 있는 사무실과 신림동 전세집을 오가는 두손에는 항상
각종 프로그램이 들려있다.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잠이 달아나요"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지만 두눈은 벌써 일에 빠져드는듯 황홀한 빛을
발한다.

사무실을 임대하고 생활을 꾸리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빌린 돈이
꽤 쌓였다.

하지만 희망에 들떠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우뚝 서겠다는 그는 행복하다.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아요.

돈은 수단일 뿐이죠.

기술개발은 결국 모두를 위한 것 아니겠어요"

미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다.

나아가는 길도 갈래갈래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일로 가는 길을 닦는 사람들.

그 속에서 희망이 움튼다.

< 김준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