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보옥의 하인인 명연을 불러내었다.

보옥의 학숙생활을 돕기 위하여 따라온 하인들은 네명이었는데, 명연을
비롯하여 소홍, 서약, 묵우 등이 있었다.

"가장 나리, 왜 저를 불러내셨는지요?"

화롯불을 살리다가 연기에 쐬었는지 명연의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니면 낮술을 걸쳤는지도 몰랐다.

"김영이 진종을 놀리고 있단 말이야. 진종이 향련과 비역질을 했다는둥
하며 떠벌리고 있어. 진종이 누구야?

보옥도령과 한짝이잖아. 진종이 모욕당하는 것은 곧 보옥도령이 모욕
당하는 것과 같은 거지.

나중에는 진종과 보옥도령이 어쩌고 저쩌고 했다는 소문이 날지도 몰라.
지금 김영을 혼을 내어 그 입을 막아놓지 않으면 말이야"

가장의 이야기를 들은 명연이 앞뒤 안 가리고 학숙으로 뛰어들었다.

"야, 김가 새끼야! 일루 나와. 뭐가 어쩌고 어째?"

하인의 신분인 명연이 김영에게 대고 욕설을 퍼붓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때 가장은 가서에게로 가 집에 무슨 일이 있다면서 슬그머니 학숙을
나와버렸다.

자기가 싸움을 붙여놓고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몸조심을 하는
가장이 영특하다 못해 간교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 종놈이 어디서 행패야? 네가 뭘 안다고 이리 난리야?"

김영도 기가 찬지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남이야 엉덩이를 까든 엉덩이에 대고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 물건이나 잘 간수해. 네 애비랑 하지 않도록. 야, 그거 세울 힘이
있으면 덤벼. 덤벼보라니까"

명연이 무식하게 육두문자를 내갈기며 김영을 윽박지르자, 김영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명연과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보옥을 돌아보았다.

"종놈이 이러는 걸 보니까 주인놈이 시켜서 그러는게 분명해. 야,
보옥이, 비겁하게 종놈을 부리지 말고 네가 직접 나와 싸워. 내가
진종이를 놀렸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좋아, 한판 붙자구"

김영이 보옥에게로 몸을 날려 보옥을 치려고 하였다.

보옥은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꼴이 되었으나 자초지종을 진종으로부터
이미 들었던 터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붙어보자 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휘이익. 저쪽에서 먹물이 그대로 담긴 벼루가 날아왔다.

김영의 동무가 명연을 향해 던진 것이었는데, 그만 가람과 가균의
자리에 떨어졌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