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의 대부로 불리는 강성진 증권업협회명예회장(68)이 오는 8일
증권가를 완전히 떠난다.

강명예회장은 취임 만2년이 되는날(4월7일)을 자신이 물러날 날짜로
골랐다.

이 2년은 강명예회장 본인이 취임 1년만에 정치적인(?)이유로 물러나야
했던 증권업협회회장직의 잔여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미련이 남았던 그 2년을 다 채운 지난3월말 강명회장은 증권업협회의
연영규회장에게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했다.

강명예회장의 의사를 전해들은 연회장은 지난달말 임시총회에서 직제개편을
하면서 명예회장직을 페지키로 결정했다.

이에따라 강명예회장은 8일 협회가 마련한 조촐한 은퇴식에서 그동안 증권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공로패를 전달받고 증권가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된다.

그날을 기다리는 강명예회장을 증권업협회의 사무실로 찾아 그동안의
지나온 나날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증권가를 떠난다는 생각이 적잖은 부담이 될텐데.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쉽고 뭔가를
잃은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이제는 쉴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임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날때
이미 증권일선에서 은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물러나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아달라"


-그래도 명예회장으로 2년을 채운데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회장직을 물러 났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됐을 때 남은 임기를
어떻게든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증권업계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시점에서 보다 젊은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도 들어 이번에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처음 증권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확히 언제인지.

"본래 직장생활은 동아건설에서 시작했다. 재정담당 임원으로 있던 59년
동아건설이 동명증권을 인수한 것을 계기로 동명증권상무로 직장을 옮긴
것이 첫 인연이었다.

이후 당시 증권가대부였던 윤응상씨가 세운 영화증권사장으로 잠시 근무한
뒤 63년 삼보증권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증권업이 내 천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삼보증권은 어떻게 인수하게 됐는지.

"당초 삼보증권은 오리엔트시계의 강영진회장이 세웠는데 1년도 채
안됐을때 증권사는 정말로 못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마침 영화증권사장으로 있는데 윤응상씨의 경영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때
였다.

그래서 내 증권사를 하나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 강회장으로부터 삼보증권
을 인수했다"


-증권가에서는 삼보증권신화라는 말과 함께 강명예회장의 업적이 고전처럼
거론되는데.

"그야말로 개척자의 선두에 선다는 생각으로 당시 증권사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추진했다.

은행들은 몇백m마다 지점들이 있어 고객들이 손쉽게 돈을 맡기고 찾을수
있었던데 비해 당시에는 주식투자를 하려면 명동까지 직접 나와야 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업계에서는 최초로 지방 곳곳에 지점들을
세웠다.

언젠가 증권산업이 치열한 경쟁시대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재양성에
눈을 뜨게 된 것도 당시상황으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직원들을 공채한 것도 삼보증권이 처음이었고 우수한 직원들은 해외유학을
보내거나 연수를 시켰다.

이같은 인재육성책을 편 결과 삼보증권출신들이 아직도 다른 증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쌍용증권의 명호근사장, 고려증권의 이연우사장등이 내가 직접 공채한
삼보맨이다.

또 삼보증권은 당시 투자공사가 독점하고 있던 공모주주선업무를 업계
최초로 시작했다.

삼보증권의 그같은 선구자적 역할이 다른 증권사들에 자극제가 됐다고
생각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키운 삼보증권을 매각한 것이 가장 아픈 기억이
될텐데.

"어쩔수가 없었다. 실속없이 바쁘게 일한 셈이다. 창구사고가 이곳저곳에서
터지는데 막을 재간이 없었다.

자세한 얘기는 하지 말자. 그래도 오늘날 대우증권이 업계1위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당시 업계 최대였던 삼보증권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한다"(강명예회장은 이 부분에 와서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먼훗날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요"라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증권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때 이른바 62년 5월증권파동등 몇가지
스캔들을 겪었는데 이제 자세한 얘기를 밝혀도 되는 것이 아닌가.

"5월 증권파동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 다만 당시에는
동명증권전무로 있을 땐데 윤응상씨로부터 엄청난 주문을 받아 회사에
수수료수입을 많이 올려줬다"(강명예회장은 또 다시 나중에 얘기하자고
더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삼보증권이후 일시 증권가를 떠났었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그냥 집에서 쉬며 지우들과 소일하며 보냈다. 그렇다고 한시도 주식시장을
잊은 적은 없었다"


-증권업협회고문을 지내고 90년 회장으로 추대됐을때 신문들은 돌아온
증권계대부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어려웠던
주식시장이 강신임회장에게 그만큼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닌가.

"정말 그때는 주가가 곤두박질하고 증권사들이 경영난을 호소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증권사들과 협의한 결과 시장을 부추길 재료가 필요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증권시장안정기금이었다.

어떻게든 시장붕괴는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부와 업계간에 형성돼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증안기금이 대단한 역할을 해냈다. 증권사의 부실화를
막기위해 이른바 깡통계좌정리에 들어간 것도 잊을수 없는 일이다.

80년대 후반 급격한 주식시장의 팽창을 타고 당시 투자자들과 증권사는
겁없이 경쟁적으로 신용거래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주가가 곤두박질하면서 신용계좌는 갈수록 비어갔고 어느 시점에선
가 과감히 잘라야 했다.

투자자나 증권사직원들의 원망을 많이 사기도 했지만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깡통계좌얘기가 나왔으니까 얘긴데 주식투자자들의 투자행태는 아직도
뇌동매매와 투기성거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바람직한 투자자상은 어떤 것이라고 보는지.

"주위사람들에게 재산관리3분법을 자주 얘기한다. 재산이 있다면 유가증권
예금 부동산에 골고루 투자하라는 것이다.

유가증권만해도 채권 주식 투신사수익증권으로 다시 3분해 볼수 있다.
이렇게 재산을 분산해 놓으면 가산탕진이라는 말은 할 필요도 할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에 투자를 하든 중요한 것은 여유자금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주식시장에서 신용거래는 필요악이다. 일정한 가수요를 창출해 주가를
조절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깡통계좌와 같은 역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질 줄아는 태도도 필요하다고 본다"


-증권업계에 하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

"현재의 증권사들은 80년대중반이후 주식시장의 급격한 팽창에 따라 성장한
결과 사상누각을 지어놓은 모습이다.

그 결과 인재부족이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증권사창구사고가
잦은것도 경험이나 분석력이 없는 젊은 직원들이 혈기만을 내세워 거래를
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은 이론만으로 살아남을수 없다. 그 이론과 현실을 적절히 조화
시킬줄 아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욱이 앞으로 자본시장의 개방이 확대되면 국내증권사들은 세계의 유수한
증권사들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한다.

증권사경쟁력은 유능한 인재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증권사들은 하루 빨리 인재양성을 서둘러야 하고 과감한 투자를
해야만 한다"


-증권업계를 떠나면서 그래도 못다한 일이 있어 아쉬운 구석도 있을텐데.

"증권업협회회장을 맡으면서 증권가사람들을 위해 증권대학과 장학재단을
만들어야겠다고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했다.

증안기금을 만들때 수익금이 생기면 조금씩 떼어내 기금으로 만들어 증권
전문가들을 육성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후배들을 만날때마다 그 일은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래도 회장으로 있을때 증권경제연구원을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보람있는 일이었다.

또 사학연금등과 같이 증권산업을 위해 평생을 지낸 사람들이 은퇴후 안정
된 생활이 가능토록 증권연금도 만들 생각이었다"


-은퇴하면 어떻게 지낼 계획인지. 혹시 회고록이라도 집필할 생각이
있는지.

"지금은 아무런 계획도 없다. 그냥 집에서 쉬다가 점심사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점심이나 얻어먹고 그렇게 지낼 생각이다.

혹시 주말에 골프치자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필드에나 나가고
다행히 아직 건강에는 자신있는 편이다.

회고록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1~2년 쉬었다가 고려해 볼 계획이다"

< 이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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