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8일 국가보훈처는 국회에 낸 자료를 통해 일제때 국내에서 활동한
몇몇 저명인사에 대한 독립유공자서훈을 재심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친일행각을 한 혐의가 있다는 설명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원래가 어려운 것이지만,특히 어려운 시대에 현실에
참여하면서 살다간 사람에 대한 그것은 더욱 어려운게 보통이다.

"비바람 부는날 황토길을 걸어야했던 사람에게는 흙탕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라는 주장,그것은 암울한 시대 현실참여자들의 비열한
자기변명일수도 있고 또 어쩌면 사실이 그럴 수도 있다.

사회학자이면서 오랜기간 독립운동사를 연구해온 신용하교수를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만나봤다. 유신과 5공이라는 또다른 질곡의 시대를
살아온 까닭에 "일제아래서의 현실참여자들"이라고도 볼수있는 국내파
지식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는지 궁금해서다. 서울대
6동422호실인 그의 방은 워낙 책이 빽빽해 "연구실이 아니라 책창고
같다"고 했더니 신교수는 "이 방 정도면 서울대교수연구실중 가장큰 편에
속한다"며 웃는다.

-해방후 친일파에대한 숙청을 단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못했다,바로 그래서 가치관의 혼돈이 빚어져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교수=나는 그런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중 하납니다.
일제아래서의 헌병 고등경찰등이 저지른 범죄는 글자그대로 민족반역죄에
해당합니다. 그런 죄를 처벌하지 않았으니,그 이후에 다른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무뎌진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볼수있지요. 바로 그런 점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된 원인을 친일파를 단죄하지 않은데서 찾는 것은 결코
비론리적이라고 할수 없지요.

-외국의 경우는 어땠습니까. 나치의 침략을 받았던 프랑스같은 나라는..

<>신교수=프랑스나 벨기에의 경우 수만명이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지요.
1차대전때 큰 공을 세워 프랑스국민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던 페텡원수도
비시정부수반으로 나치에 협력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드골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기는 했지만.. 외국의 침략을 받았다가 광복을 맞은
나라치고 부역자를 처벌하지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왜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다고 보십니까.

<>신교수=48년8월15일 정부가 수립되고나서 제일 먼저 하려던 일중의
하나가 친일파처벌이었지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특위에서 약1천명정도의 친일파를 단죄하려고 했었는데,결국
유야무야로 끝났지요. 그 원인은 정부가 수립됐지만 행정의 하부조직은
일제때나 미군정때와 마찬가지로 친일파들로 채워져있었고 그들이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일제가 끝나면서 바로 우리 정부가
들어섰다면 상황이 상당히 달려졌을 거예요. 그러나 행정공백을
우려,일제때의 경험자들을 그대로 기용한 미군정이 3년이나 계속 되면서
친일파들의 기득권이 굳어진데다 이승만대통령이 김구선생암살사건등
정치적 소용돌이속에서 자신의 필요도 겹쳐 그들의 발호를 묵인했기 때문에
그 모양 그꼴이 되고 만셈이지요. 반민특위의 활동도 친일파 경찰들에
의해 사실상 강제로 끝났잖습니까.

-그때 대대적으로 친일파들을 제거했더라면 그후의 경제개발이나
국가건설은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지장이 있었을 것 아니냐는 시각도
전무한건 아닌것 같습니다만..

<>신교수=대표적인 친일파 1천여명정도를 제거했다고해서 무슨 지장이
있었겠습니까. 일제때 고등계형사나 헌병노릇을 했던 친일파중에
반공전선에 앞장선 사람들이 많은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죄없는 사람을
공산당으로 몬게 또 얼마나 됩니까. 나는 친일파들을 단죄.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등 행정의 하부조직이 죄의식조차 결여,부정선거등
극심한 부정부패를 가져오게돼 그후의 국가건설에도 짐이 됐다고 봐요.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을 재심사하자는 논의가 나오게된 배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신교수=초기에 독립유공자 서훈 결정과정에 문제가 있었어요. 가족들의
신청을 받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결정했는데 외부의 압력이 큰 영향을
미쳤던것 같아요. 지금은 교수등 전문가들과 독립유공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각종자료를 엄격히 검증,서훈을 결정하기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문제가 된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라고 보십니까.

<>신교수=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교육 문화사업등으로 큰 공을 남겨
친일파라고 분류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분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도 일제말기에 본인명의로 친일적 글을 발표한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 잘한것과 잘못한 것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해외독립투사와 국내에 있으면서 싸웠던 사람을 같은 자로 재서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신교수=그야 물론이지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국내에서 투쟁한 분들이 더 어려운 여건이었고
갈등과 고뇌도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신교수=글쎄요. 역시 어려움은 해외쪽이 많지 않았을까요.
해외독립투사중에는 때로는 끼니를 굶어야했던 분들이 많고,그런 어려움의
결과로 자녀를 제대로 교육시키지못해 집안이 몰락한 분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물론 국내에서도 어려웠지요. 그러나 내면적인 갈등과 고뇌도
해외에 있었다고해서 국내보다 적었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일본 역사소설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모두 멋있게 미화돼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반면 우리 역사소설에는 반드시 간신이 나오죠. 역사적인 인물을 보는
시각이 우리는 너무 편협한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신교수=그런 경향이 있는것은 사실이지요. 역사적인 인물 인재에대해
애정을 갖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폄하하려는 성향을 고쳐야해요.

-왜 그런 성향이 보편화됐다고 보십니까.

<>신교수=우선 문화적 전통에서 원인을 찾아야겠지요. 역사적으로 우리는
눈길을 대외적으로 돌린 시대가 없잖아요. 지나치게 내부지향적인
문화,그것이 결국 인물평가도 좁게 가혹하게 만든 토양이 된 셈이지요.
여기에 겹쳐 역사적 인물의 자손들 잘못도 원인이 됐다고 봐요.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역사적 인물이라면 다 그나름의 역할이 있었는데
자기조상만 진선진미하다고 내세우다보니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 서로
폄하시키는 결과가 됐지요. 이번에 재심사얘기가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과도 있지만 공도 많아 전체적으로 보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사람을 자손들이 공만 과다포장을 하다보니 반발을 부른 경우가
있다는 얘깁니다. 정말 조국광복 외길에 모든 것을 바친 거물
해외독립투사보다 훈격을 높게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경우도 있거던요.
그래서 그 사람의 과실을 실제이상으로 보려는 반작용이 나오게 된 셈인데
결국 잘못은 자손들에게 있는 셈이지요.

-인물에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생애와 가까운 시점에서 내려진 것일수록
관련증인들도 많고 정확한것 아닙니까. 독립유공자의 경우 라면
지금보다는 60년대의 평가가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신교수=반대지요. 당대의 평가는 세력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이순신도 1등공신,원균도 1등공신으로 책봉되는게 당대의 평갑니다.
역사적인 평가에서는 절대로 두 사람이 같을수 없지요. 둘 다 전사했지만
패장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기준이잖아요.

-H씨등 신분은 일제고등계형사지만 독립투사들과 협력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만약 그 사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또 적중에서
암약하기위해 고등계형사가 됐는데 미처 활동할 기회도 없이 해방을
맞았다면 어떻게 됩니까. 거듭 말하지만 사람평가란 어려운것 같아요.

<>신교수=H씨 말이 났으니까 얘긴데 그 사람 자손들이
독립유공자서훈신청을 해 몇년째 계류중입니다. 일제고등계형사로
의열단사건에 몇차례나 가담,징역을 가기도 했는데.. 어쨌든 아직 결론을
못내고 있어요. 그사람이 가담해 성공한 사례를 단 하나라도
찾아야겠다,그뒤에 서훈을 해도 늦지않다고 보는 겁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고간 사람에대한 평가는 또다른 의미에서 그만큼 어렵고,그러므로
신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담한 사건마다 사전에 탄로나 의열단원들이
대거 체포됐으니,그 사람도 다른이들보다 짧은 기간이지만 징역을 가기는
했으나 밀정이 아니었는지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두운 한 시대를 평가 정리하는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군요.

<>신교수=평가도 어렵지만 그 잔재를 청산하기는 더더욱 어렵지요.
조선총독부건물이 국립박물관으로 계속 남아있는 현실을 보십시오.

-그 건물을 헌다고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건물이 없어진다고
일제침략기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건물을 그대로 두는것이
잊지말아야할 역사를 교육시키는 효과도 있지않습니까.

<>신교수=일본침략의 상징인 조선총독부건물안에 우리 역사와 민족문화의
정수들을 한데모아 전시하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우리는
아직도 일제침략기와 관련,정리해야할게 많아요.

대담=신상민<부국장대우> 산업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