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부는 노사관계의 규칙에 대해 종래의 입장을 바꿈으로써 많은
논란을 빚고 있다. 그 하나가 노동부장관의 "무노동 부분임금제" 도입
방침이다. 이는 종래 노동부가 견지해 왔고 시행착오를 거쳐 하나의 제도
로서 정착단계에 이른 "무노동 무임금제",즉 파업기간중의 임금비지급
정책을 포기함을 뜻한다.

무노동부분임금제는 파업기간중에도 노동자의 생활보장에 필요한 부분의
임금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노동제공의 대가로 지급되는
교환적인 부분의 지급만 중단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노동부분임금제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문제점을 갖고 있다.
먼저 무노동부분임금제를 실제 시행할 경우 고임금 직종의 노동자는
파업기간중에 부분임금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왜 생활보장비가
직종에 따라 달라야 하는지 그 근거가 없다. 가족이 많은 사람 그리고
생활비를 많이 쓰는 사람은 생활보장비를 더 많이 받아야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잡다한 계산에 정부가 일일이 간섭해야하는 것일까. 또 하나의
문제점은 왜 파업중의 무노동 근로자만 생활보장을 해주어야 하는가이다.
유휴여성인력,고령인력,능력에 걸맞는 직장을 찾지못한 반실업자,그리고
실업자는 왜 생활보장을 받지못해야하나,생활보장비가 노동의 교환에 따른
대가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받아야 할텐데 그것을 지불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무노동 부분임금제의 취지는 근로자권익을 향상시키고 문민시대를 맞아
노동정책도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데서 나온 것일게다. 그렇지만 변화가
곧 개혁은 아니다. 남미에서본 노조와 정치의 유착이 초래한 경제 파국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러면 어떤것이 개혁인가. 그것은 김영삼대통령이 강조한 바와같이
작은정부 강한정부 그리고 고통분담에 의한 한국병퇴치이다.

그런데 첫째 무노동부분임금제는 고통분담론에 위배된다. 고통분담론은
남의 책임까지는 맡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는
것이다. 파업기간중의 무노동 무임금은 노동자는 무임금이라는
고통을,사용자는 생산중단의 고통을 각각 자기 책임으로 감내하는 고통분담
행위이다. 이러한 고통이 있기에 일시적으로 분규에 휘말린 노사도
궁극적으로 서로 화해하고 생산재개에 합의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무노동부분임금제는 작은 정부-강한정부에 위배된다. 정부가 해서는
안될 일은 안하는 것이 곧 작은 정부다. 파업기간중 노동자가 지불해야할
무임금이란 희생을 노동부가 부분임금제로 덜어준다면 노동자는
생산성증대에 의한 임금상승보다는 대사용자 임금투쟁에 더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생산과정에 쓰여져야 할 인적 물적 자원이 노사분규로 낭비된다.

강한 정부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정부가 해야할 일을 회피하지 않고
행하는 정부다. 정부가 해야할 일은 법과 규칙의 제정,그리고 이의 집행에
의한 질서의 확보및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다. 이는 사회의 생존 번영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가시적 성과가 조기에 나타나지 않고 인기가 없을
수도있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이를 추진할 강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다.
무노동무임금정책은 노사교섭을 위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이다. 이를
집행할수 있는것이 곧 강한 정부다.

애덤 스미스가 밝혔듯이 국부는 다량의 금화 은화도 아니고 거대한
토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국부의 원천은 노동이다. 노동생산성의
증대가 곧 국부의 증진이라고 할때 노동의 수급을 담당하는 노동부의
임무는 막중하다. 따라서 노동부는 좁은 안목에서 벗어나 원활한
노동시장의 유지 발전으로 국민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큰 행정을
보여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