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54명의 사망자를 낸 전남도청앞 집
단발포때 공수부대들이 미리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언이 당시
공수부대 핵심지휘관등으로부터 처음 나왔다. 이는 88년 국회광주
민주화운동진상조사 청문회에서 당시 특전사지휘관들이 "특전사병
력이 실탄을 휴대치 않았다"는 증언을 뒤엎는 것으로 이들의 증언
이 거짓이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증언이 되고 있다.
80년 5월21일 전남도청앞 집단발포때 특전사병력이 실탄을 휴대했
었는지 여부는 당시 신군부세력이 이에 앞선 특전사병력의 과잉진
압과 함께 잔인한 진압의 의도성을 캐는 중요한 실마리이자 54명의
사망자를 낸 이 집단발포가 광주사태를 악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광주진상규명에 핵심사항이 되어왔다.
광주에 투입됐던 3개 공수여단 가운데 7공수여단장이었던 신우식
씨(60,당시준장)는 16일 중앙일보와가진 인터뷰에서 "21일 도청앞
발포때 사용한 실탄은 공수부대들이 진압을 위해 시위현장에 출동할
때 이미 가지고 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신씨는 "공수부대의 실탄휴
대는 전시에 1인당 1백20여발,일반 작전시 60여발인데 도청앞 집단
발포전 숙영지인 전남대,조선대에서 도청앞등 시가지로 출동할때 1
인당 60여발의 실탄을 분대별로 지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
다.
그는 "집단발포시 나는 전교사사령부 상황실에서 도청앞에 나가
있던 휘하 35대대를 지휘했다"며 "당시 31사단으로부터 실탄을 인
수받았다는 보고를 받은 바 없다"고 말했다.
신씨는 "원래 ''면도날 부대''로 살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임무를 마
치는 공수부대를 18일 광주에 투입한 것 자체가 잘못"이며 "집단발
포는 이 때문에 별도의 명령없이 일선대대장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자위권의 발동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공수부대의 투입자체가 유혈충돌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전남대등 외곽에 숙영중인 공수병력의 "시
가지 투입결정은 정웅 31사단장이 내린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
다. 5,18 당시 전남북계엄분소가 있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수송대
운전병 문광식씨(35,당시상병.충남천안시)는 "18일 오전 공수부대
병력을 도청앞으로 수송하기 위해 숙영지인 조선대에 갔을때 부대
원들이 줄을 서 실탄을 지급받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신시의 증
언을 뒷받침했다.
88년 국회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왔던 최웅 11공여단장,안부웅 11
공수61대대장,김일옥 7공수35대대장등 광주출동 공수부대 지휘관들
은 당시 특전사병력이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으며 "시위대가 계엄군
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철수하는 향토부대 31사단(사단장 정웅소장)
으로부터 실탄을 받아 자위행위로 발포했다"고 증언했었다.
한편 윤흥정 전교사사령관(67,당시 중장)는 16일 본지와의 인터뷰
에서 "공수부대들이 과잉진압을 계속해 일반 보병부대로 교체할 계
획을 추진중이었다"고 증언했다.
윤씨는 "19일 오후 관계기관장 회의에서 "공수부대들이 너무 과잉
진압을 계속해 원성이 높다"는 행정기관장들의 보고를 받고 그 자리
에서 공수여단장들에게 과잉진압 자제를 지시한뒤 이희성계엄사령관
과 협의,일반부대로 대체할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씨는 "시위상황이 악화돼 부대교체 대신 공수부대를 외곽
으로 철수시키기로 최종 결정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