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87년 3천1백10달러에서 92년엔 6천7백달러로. 6공정부 5년간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이렇게 배증했다.

실질임금도 매년 10%내외씩 불어났다. 도시건 농촌이건 가구당
소비지출도 이기간중 2배로 늘어났다. 고급피혁제품인 무스탕이 날개
독힌듯 팔리고 외식산업이 번창하는등 의식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주택보급률도 76%로 뛰어 올랐다. 인구 12명당 1대꼴로 승용차도 굴리고
있다.

6공집권기간중 국민생활은 누가 뭐라해도 질적향상을 이룩한게 분명하다.
지표상으로만 그런 것도 아니다. 휴가철이면 동남아행비행기표가 동이
나고 국내호텔은 으레 만원사례였다. 과소비 진정책이 동원될정도로
"생활대국"에의 길로 줄달음쳤다.

국민생활 측면에서 보여준 이같은 공에도 불구하고 6공경제정책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상은 그리 좋은게 아닌듯 하다. 실제로 기업하는 사람들은
기업하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일반인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6공경제에 대한 이같은 평가절하는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과 무관치 않다.
가장 심한 비판을 받는 대목중의 하나가 정책의 일관성 신뢰성문제다.
정책기조부터가 오락가락했다는 얘기다. 3공의 "성장"이나 5공때의
"안정"과 같은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채 "때로는 성장,때로는
안정"하는 식으로 성장과 안정사이를 넘나들었다.

정책기조의 변경은 완벽한 현상분석력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여론이나
시류에 따라 이리끌리고 저리 밀린 결과였다.

정부가 제시한 정책을 정부스스로 아예 취소하거나 혹은 일도양단식으로
밀어붙이다가 신뢰성에 금을 가게 하고 부작용만 잔뜩 불러온 경우도
여러차례 경험했다. 실시준비단까지 발족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연기된
금융실명제파동과 사업자선정까지 끝냈다가 백기를 든 이동통신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6공의 경제정책은 또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하는게 꽤나 많았다.
주택2백만호건설등의 정책은 공약사업이라는 점에서 앞뒤를 가리지않았다.
"자원의 제약"이라는 조건을 무시한채 "과욕"을 부리면서 경제를
망가뜨렸다. 인력난과 자재난을 부추겼고 무역적자까지심화시킴으로써
"주택값안정"이라는 공은 묻히고 말았다.

대기업정책도 정치논리가 우선했다. 신산업정책이란 용어가 이따금씩
튀어나오면서 기업의욕을 무질러 버렸다는 점도 간과할수 없는 대목이다.

이러다보니 정부정책에 믿음이 가지않는 것은 당연했다. 기업은 기업대로
불안해하고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커지기만 했다. 그래서 기업이
투자의욕을 잃고 근로자들은 근로의욕을 상실하는등 경제가 계속 시들어진
것이다.

6공의 경제정책이 이처럼 표류한 것은 처음부터 사람쓰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제각료를 너무 자주 바꿔 치웠다는 것이다.
첫내각은 9개월만에 중도하차했고 1년이상 재임하면 장수장관이라고 불릴
판이었으니 정책의 일관성을 기대할수 없었다.

정책의 조화를살릴수 있도록 팀을 짜맞추지도 못했다. 부총리와
각부처장관및 청와대경제수석,그리고 한은총재등 같은 경제팀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구난방식으로 제각기 실효성없는 정책을 양산해
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중소기업정책은 특히 메뉴는 많은데 실제로 먹을게 없었다. 재탕 삼탕한
것이 아니면 부처간 생색내기 위주로 짜여진게 대부분이어서 애시당초
실패할게 뻔한 것들이었다.

6공1기의 경제정책을 모두 평가하기엔 아직 이르다. 또 민주화과정에서
분출된 각 경제주체들의 제몫찾기 욕구가 드세었고 국제화 자율화
개방화등의 시대상황도 고려돼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6공경제정책은 시대상황의 적절한 대응에 실기하거나 서두른감이 짙다.
합리성과 일관성 없이 우왕좌왕했다는 뜻이다.

이같은 지적은 새정부에 주는 값진 교훈일 수도 있다. 안정 성장
개혁등의 용어가 뒤범벅이 되는등 새정부의 경제정책이 벌써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욱 그렇다.

김영삼차기대통령은 지난 선거때 현정부를 물정부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도 뚜렷한 정책의지 없이 5년간을 허송세월하다간 똑같은 비난을
면치못할 것이다.

<유화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