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세잔(1888~1890).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마담 세잔(1888~1890).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못났다, 못났어. 호호호…. 저 그림 속 여자 좀 봐. 정말 너무하지 않아?”

190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가을 박람회. 1년 전 세상을 떠난 ‘현대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1839~1906)의 초상화 작품 앞은 언제나 여성 관객들로 붐볐습니다. 그림을 보러 온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 못생긴 여자 그림이 있는데 그 옆에 서면 누구라도 예뻐 보인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앞을 약속 장소로 택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도 그럴 만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의 표정은 우울하면서도 냉정했고, 얼굴빛은 창백했습니다. 얼굴은 길쭉한 데다 옷과 머리는 투박하기 짝이 없었고, 귀걸이나 팔찌같은 장신구도 하지 않았고요. 자세와 분위기에서도 매력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바로 화가의 아내인 마리 오르탕스 피케(1850~1922). 세잔은 평생 이런 식의 아내 그림을 수십 차례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습니다. 도대체 왜 저런 식으로 그리는 거냐고. 오죽 아내가 싫으면 그랬겠냐고. 그러고 보니 저 오르탕스라는 여자, 무식하고 성격 더러운데다 낭비벽도 심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오르탕스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고, 이런 해석은 정설로 굳어졌습니다.

오르탕스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요. 세잔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세잔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근래 연구에서 밝혀진 오르탕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아는 '괴짜 천재', 세잔의 이야기

사과 바구니(1890~1894). 시카고미술관 소장
사과 바구니(1890~1894). 시카고미술관 소장
먼저 세잔이 피카소를 비롯한 위대한 현대미술가들에게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극찬을 받는 이유를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정물화를 보시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이 좀 이상합니다. 바구니는 불안정하고, 테이블은 수평도 안 맞고, 형태도 단순하고, 색채나 표현도 투박해서 왜 대단하다는지 이해가 안 가지요. 발표 당시에는 정말 엄청난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림 실력이 너무 끔찍해서) 술 취한 사람이 토해놓은 것 같다”는 평론가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 그림 속에 숨겨진 의미가 알려지면서 평가는 180도 바뀌었습니다.

의미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세잔이 등장하기 전 화가들은 그림을 ‘사진처럼’ 그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사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카메라가 사진을 찍는 것과 다릅니다. 카메라 렌즈는 하나지만, 사람의 눈은 두 개지요. 카메라는 고정된 상태로 사진을 찍지만 사람의 눈은 계속 깜빡이고 움직이며 초점을 바꿉니다. 세잔은 생각했습니다. “사진을 따라 그린 이미지가 아니라, 내 눈으로 본 세상을 정확하게 그리겠다.” 이렇게 ‘내가 본 세상’을 마음대로 그린다는 혁신은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현대미술의 바탕이 됩니다.

이런 꿈을 품고 현실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세잔은 미술 천재였습니다. 하지만 인격은 평균 이하였습니다. 우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타고났거든요. 쉽지 않은 현실은 그의 성격을 더 꼬이게 했습니다. 법률가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화가의 길을 걸은 세잔. 하지만 오랫동안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50대 이전까지 돈을 벌지 못해 아버지가 준 용돈으로 생활해야 했지요. 성공해서 먹고살 만해진 뒤에도 이런 성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예민했는지 넘어질 뻔한 자신을 잡아준 후배 화가에게 “왜 내 몸을 만지느냐”고 소리 지르며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담 세잔(1883~1887).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마담 세잔(1883~1887).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저렇게 아름답고 탁월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성격은 왜 저리 나쁜지. 그리고 멋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내가 괴롭혀서 그런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그럴듯한 증거는 차고 넘쳤습니다. 일단 초상화를 보면 세잔이 아내를 싫어한다는 건 명백해 보였습니다. 세잔이 평소 아내에 대해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둥, “레모네이드만 좋아한다”는 둥 험담을 한 적도 있었고요. 세잔의 가족들과 친구들도 모두 그녀를 “무식하고 사치스럽다”며 싫어했습니다.

그녀는 1906년 세잔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퍼졌습니다. “비싼 맞춤옷 사느라 장례식에 안 갔대.”

우리가 몰랐던 그녀의 이야기

마담 세잔(1877). 보스턴미술관 소장
마담 세잔(1877). 보스턴미술관 소장
하지만 이런 얘기는 지난 10여년 사이 사실과 전혀 다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시계를 돌려 세잔과 오르탕스가 만난 건 1869년. 서른 살이던 세잔은 책방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던 열아홉살의 오르탕스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은 같이 살기 시작했고, 3년 뒤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은 여느 가정과 달랐습니다. 세잔이 혼인 신고도 안 하고 아버지에게 결혼 사실을 숨겼거든요. 말도 안 하고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을 들키면 용돈이 끊길까봐 그랬습니다. 찌질하지요.

아무리 따로 산다고 해도, 자식이 손자까지 낳았는데 모를 수가 없지요. 결국 아버지도 세잔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다행히 용돈을 끊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집 식구들의 괴롭힘과 구박이 시작됐습니다. 오르탕스가 돈 없는 평민 출신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습니다. 오르탕스의 편이 돼줘야 할 세잔도 ‘남의 편’이었습니다. 아내를 무시하고 아들만 예뻐했거든요. 세잔과 오르탕스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한 건 아들이 열네 살이던 1886년. 아내를 사랑해서 혼인 신고를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죽으면 아들에게 유산이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조차 세잔은 오르탕스를 무시했습니다. 오르탕스가 무슨 말을 할라치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한다”며 면박을 줬습니다. 남편도 존중하지 않는데 친구들이 그녀를 존중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잔의 친구들은 오르탕스를 ‘La Boule’(덩어리)라 부르며 킥킥댔습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르탕스는 세잔의 작품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든든히 뒷받침해줬습니다. 그중에서도 세잔의 작품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오르탕스가 29점이나 되는 초상화의 모델을 서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잔의 초상화 작품 중에선 오르탕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1899). 볼라르가 115번에 걸쳐 모델을 섰는데도 세잔은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쁘띠 팔레 소장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1899). 볼라르가 115번에 걸쳐 모델을 섰는데도 세잔은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쁘띠 팔레 소장
‘모델 좀 서주는 게 뭐가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잔은 당시 모델을 괴롭히는 화가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한 번 그렸다 하면 서너시간은 기본이었고, 그림 하나를 위해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만히 있으라”며 불같이 화를 내서 모델이 기절하거나 도망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제대로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잔에게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세잔은 한 작품을 그리는 데에 몇 개월에서 몇 년이 걸릴 정도로 그림을 천천히 그렸습니다. 이리저리 구성을 바꾸고 짜 맞추는 시행착오를 거쳐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구도와 묘사를 찾는 식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사과를 비롯한 물건들을 그릴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초상화는 달랐습니다. ‘사과처럼 앉아있을 수 있는’ 모델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노란 암체어에 앉아있는 세잔 부인(1893~1895).
노란 암체어에 앉아있는 세잔 부인(1893~1895).
그 드문 모델이 오르탕스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모델을 서 줬습니다. 덕분에 세잔은 오르탕스를 소재로 온갖 시도를 거듭하며 사람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딱히 슬프거나 못생긴 느낌을 주도록 그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림에 미친 사람답게, 아내를 그저 ‘미술적 탐구 대상’으로만 봤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오르탕스는 세잔이 인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습니다. 작품 외적으로 봐도 오르탕스의 기여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일단 아들을 혼자서 다 키워냈고요. 남편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책을 몇 시간씩 읽어주며 ‘멘탈 케어’도 해줬습니다. 세잔이 미술계에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아들과 함께 작품 관리와 전시회 준비, 저작권 문제 논의 등 돈과 관련된 일을 도맡았습니다.

끝까지 고마움 몰랐던 세잔, 그리고 그 후

세잔이 7년에 걸쳐 그린 말년작 '목욕하는 사람들'(1898~1905). 세잔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1906년 세잔이 사망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오르탕스가 없었다면 세잔의 인물을 그리는 실력은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세잔이 7년에 걸쳐 그린 말년작 '목욕하는 사람들'(1898~1905). 세잔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1906년 세잔이 사망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었다. 오르탕스가 없었다면 세잔의 인물을 그리는 실력은 이만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세잔이 불세출의 천재였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르탕스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취를 이루기는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오르탕스는 세잔을 돕는 일을 묵묵히, 그것도 탁월하게 해냈습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심으로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한 인간이 혼자 빛날 수는 없는 법. 그 뒤에는 언제나 그를 뒷받침하는 숨은 영웅들이 있습니다. 오해와 자료 부족 때문에 ‘악처의 대명사’로 기억됐던 오르탕스가 그랬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했을 인정과 감사를 뒤늦게나마 그녀가 받을 수 있게 돼서 다행입니다.

뒷얘기는 좀 씁쓸한데, 정작 세잔 본인은 아내에게 끝까지 고마워할 줄을 몰랐습니다. 1897년 세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둘의 관계는 잠깐 나아지는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1902년 세잔이 “내가 죽고 나서 오르탕스에게는 한 푼도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한 뒤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졌습니다. 오르탕스의 인내심도 이제는 바닥이 났습니다. 그녀는 세잔이 아파트 한쪽에 모아놨던 지긋지긋한 시어머니 물건들을 깡그리 갖다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지인이 놀라서 “그래도 되냐”고 묻자 오르탕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알 게 뭐에요.”

시누이는 끝까지 ‘진상’이었습니다. 1906년 세잔이 병에 걸려 죽자 시누이는 조카(오르탕스의 아들)에게 연락해 “너만 오고 너희 엄마는 데려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행인 건 오르탕스가 자기 몫을 제대로 챙겼다는 겁니다. 오르탕스는 시누이 말대로 장례식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들을 시켜 세잔의 유작들을 거액(당시 27만5000프랑)에 팔아넘기는 작업에 즉시 돌입했습니다.
세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드놀이하는 사람들'(1892~1895). 코톨드미술관 소장
세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드놀이하는 사람들'(1892~1895). 코톨드미술관 소장
유언장 내용으로만 보면 이 중 오르탕스가 상속받을 수 있는 몫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엄마 말 잘 듣는 아들은 판매 대금의 상당 부분을 오르탕스에게 줬습니다. 돈을 챙긴 오르탕스는 스위스의 휴양지와 모나코를 오가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세련된 옷을 사고, 카페를 방문하고, 카지노에서 도박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녀가 말년에나마 행복했던 것 같아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온실에 있는 세잔부인(1891~1892).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온실에 있는 세잔부인(1891~1892).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이번 기사의 내용은 ‘Cezanne's Other : The Portraits of Hortense’(Susan Sidlauskas 지음)와 ‘Madamn Cezanne’(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도록) 수록 글, ‘Cezanne: A Life’(Alex Danchev 지음)와 폴 세잔(올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지음, 박미연 옮김, 마로니에북스), 세잔의 사과(전영백 지음, 한길사)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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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