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해플리거와 함께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해플리거와 함께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얼음 공주요? 저에 대해 ‘엄격하게 연주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제 연주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겁니다.”

세계적 권위의 미국 그래미상을 세 차례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은 5월 30일 가진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빈틈 없는 기교, 이지적인 곡 해석으로 인해 냉기가 느껴진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얼음 공주'로 불리던 그의 별칭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바이올린 여제(女帝)'로 바뀌었다. 누구나 켤 줄 아는 단순한 선율 하나만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그런 바이올리니스트 말이다.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금빛 드레스를 입고 오른 힐러리 한의 연주력은 듣던 대로였다.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을 달라는 듯 청중을 향해 손짓하더니, 이내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첫 작품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협주곡에 버금가는 화려한 기교와 강렬한 악상 덕분에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 소나타’로 평가받는 곡이다. 힐러리 한은 시작부터 특유의 깨끗하면서도 명료한 음색과 밀도 있는 보잉(활 긋기)으로 베토벤의 열정적 선율을 토해냈다.

연속해서 활을 강하게 내려치면서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다가도 금세 움직임을 줄인 채 서늘한 음색으로 서정적인 선율을 풀어내는 그의 연주는 작품의 극적인 악상을 살려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손가락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주 구간에서도 세밀한 터치와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은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정교하게 활을 다루며 작품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풀어내는 능력이 특히 돋보였다. 힐러리 한은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보다 활을 제한적으로 쓰는 편이었는데, 어떤 '소리의 남용'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예민하게 활의 양과 현에 가하는 장력을 조절해가며 바이올린의 다채로운 색채를 선보였다.

마치 칼로 베는 듯한 날카로운 음색으로 무대를 장악하다가 돌연 깃털로 쓸어내는 듯한 부드러운 음색으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베토벤 작품에 담긴 입체감과 깊은 서정이 완연히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3악장에서는 활로 현을 꼬집는 듯한 강렬한 테크닉과 또렷한 리듬 표현으로 작품 특유의 역동성을 표현했다.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해플리거와 함께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해플리거와 함께 연주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힐러리 한만 보면 분명 좋은 연주였다. 하지만 바이올린 소나타가 피아노와의 앙상블이 매우 중요한 장르란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 있었다.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해플리거의 터치는 힐러리 한에 비해 다소 무겁고 뭉툭한 편이었는데, 같은 음형의 선율을 주고받을 때도 간극이 좁혀지지 않아 두 악기의 선율이 겹겹이 층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소리가 어긋나는 구간들도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바이올리니스트보다 더 빠르게 연주하면서 선율 간격이 벌어지거나 리듬이 엉키는 순간들이 더러 있었다.

이어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에서는 앙상블이 안정을 찾으면서 보다 유려한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노장 바이올리니스트 로데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루돌프 대공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간결한 선율과 명료한 리듬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힐러리 한과 해플리거는 음량, 음악적 표현, 연주 속도 등을 긴밀히 맞춰가면서 자칫하면 단조롭게 들릴 수 있는 선율에 풍부한 악상을 채워 나갔다. 힐러리 한은 소나타 9번 연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여린 음색으로 베토벤의 순수한 서정성을 펼쳐냈다. 음량을 키우기 위해 물리적 힘을 가하는 것이 아닌 각 음의 울림을 키우며 소리의 두께를 만들어내는 그의 연주에서는 노련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힐러리 한의 연주는 그가 여전히 전성기란 걸 보여주는 자리였다.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기교와 자신만의 해석이 가미된 선율 표현은 청중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10대 소녀로 데뷔한 순간부터 불혹을 넘긴 지금까지, 왜 여왕이란 호칭이 그에 따라붙는지를 확인하는 데 2시간이면 충분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