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rgen Fr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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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리더십의 무대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말했다. "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정치인이 필요 없다. 쉬운 문제는 대개 저절로 해결된다. 균형이 흔들리고 조화가 안개에 휩싸일 때야말로 세계를 구할 결정이 모습을 드러낼 기회다."

미중 반도체 전쟁, 인구 절벽과 경제 성장세 둔화…. 한국 사회가 그냥 위기도 아니고 '복합위기'에 처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때맞춰 '살아있는 외교 전설' 헨리 키신저가 리더십을 논한 책이 국내 출간됐다. 원서가 지난해 출간된 최근작이다.

<헨리 키신저 리더십>은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만난 6명의 리더에 대한 책이다. 키신저까지 포함하면 7명의 리더를 책 한 권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셈이다.

키신저는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 국제 관계와 관련해 가장 권위 있는 인물, 고급 정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로 여겨진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1970년대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1977년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후에도 미국 정부의 고문 또는 특사 역할을 도맡았다.

1923년 태어난 키신저는 오는 27일 만 100세 생일을 맞는다. 한 세기.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시대를 헤아리는 기준으로 통하는 100년을 살아낸 그의 증언과 통찰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외교 최전선에서 수많은 리더를 만났던 키신저는 6명의 리더에 주목했다. 이스라엘에게 나치 피해를 사과하고 배상한 콘라트 아데나워 전 서독 총리, 현대 프랑스를 건설한 샤를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 '닉슨 독트린'을 선언한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 아랍권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으며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한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 싱가포르 초대 총리 리콴유,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이들은 공통적으로 세계대전을 통과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부터 1945년 9월 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여섯 명은 각기 전쟁에 직접 참전하거나 나름의 방식대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키신저가 20세기 전쟁 시기의 리더들을 새삼 소환한 건 의미심장하다. 그는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인류의 운명은 미국과 중국이 잘 지내느냐에 달렸다. 5~10년 안에 전쟁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전쟁 위험성을 경고했다.
‘국제외교의 전설’ 100세 맞은 키신저가 말하는 리더십
책은 서론과 결론을 제하면 총 여섯 장으로 구성돼 있다. 리더 여섯 명에게 각 한 장씩을 할애해 각 인물의 생애와 리더십을 정리했다. 리더십에 관한 책이자 역사서이고 전기(傳記)다. 각 장의 제목이 각 리더의 전략을 요약한다.

키신저는 대처가 '신념의 전략'을 썼다고 봤다. 대처는 전쟁 직후 미국의 부상으로 영국이 국제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경제위기에 처하자 과감한 경제개혁을 펼쳤다. 키신저는 유럽 주요 정당 최초의 여성 대표가 된 직후 대처의 인터뷰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추구하는 목표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정부에 집중되지 않고 시민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자유로운 사회를 추구할 겁니다. 그리고 정부의 수중에 있지 않고 시민과 국민에게 폭넓게 분배된 사유재산이 이 권력을 뒷받침할 겁니다."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로서 이 신념을 정책으로 풀어냈다.

회고록 등 풍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다. 하지만 40쪽 넘는 각주는 이 책의 진짜 무기가 아니다. 사실 리더십에 대한 책은 많다. 역사 속 리더십 사례를 소개하는 책도 흔하다. 이 책의 독보적 매력은 키신저가 세계사 속 쟁쟁한 리더들을 직접 대면한 경험을 적었다는 점이다. 키신저이기에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이 책을 대체불가능한 저작으로 만든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1957년 샤움부르크 궁 총리 집무실에서 만났던 아데나워에 대해 키신저는 "40대 초반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일부 경직된 그의 얼굴과 공손하면서도 초연한 태도는 상대방에게 이곳이 원칙에 따라 움직이며 구호나 압박은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메세지를 분명히 했다"고 적었다. 아데나워와 마주 앉았던 사람만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이다. 독일과 미국의 핵전술을 둘러싼 신경전 등 생생한 회담 후일담도 들려준다.

당대 자신의 판단 착오도 솔직하게 기록했다. 키신저는 여성 정치인 대처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책을 닫는 '감사의 말' 끝에 이렇게 적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이 책의 부족한 점은 모두 내 탓이다."

이런 후일담이 리더십이라는 주제에 곧장 수렴되지 않아 책이 다소 산만한 인상을 주는 건 사실이다. 당대 외교 테이블 위에 올랐던 현안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내어준다. 하지만 이런 '의도된 산만함'은 '리더십은 복합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책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키신저는 이렇게 적었다. "의미 있는 정치적 선택은 변수가 하나뿐인 경우가 거의 없다. 현명한 결정을 내리려면 역사에서 얻은 직관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기술적, 심리적 통찰이 필요하다."

키신저는 결론부에 이르러 리더 여섯 명의 또 다른 공통점을 알려준다. "이 책에서 살펴본 리더 여섯 명 중 누구도 상류층 출신이 아니었다. (생략) 대처는 식료품상의 딸이었고 영국 보수당 당수로서는 히스 이후 두 번째로 중산층 출신이자 최초의 여성이었다. 출발선에서부터 훗날 걸출한 인물이 되리라는 걸 예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다." 이런 변변찮은 배경 덕분에 오히려 기존의 리더십에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며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여러 저항과 맞서 변혁을 쟁취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역사가 됐다.

"진정 원대한 정책을 펼칠 지도자가 하나라도 남아 있는가?"는 아데나워의 질문은 오늘날 '원대한 지도자를 발굴할 정책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키신저는 말한다. "기술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직업을 준비하는 양적 교육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고, 활동가를 양성하는 교육은 지나친 특수성과 정치색을 띠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의 상상력이 샘솟던 전통적 원천인 역사나 철학은 어느 쪽에서도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

위기를 타개할 리더십을 논하던 책은 교육·인문학의 중요성, 독서와 사색의 필요성, 문해력이나 소셜미디어의 편향성에 대한 우려로 끝을 맺는다. 타인의 비극에 감응할 줄 알고 포용성과 다양성을 갖춘 사회가 지도자를 길러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조금 고리타분한가. 하지만 어떤 진실은 뻔한 문장 속에 있기도 하다. "동등하지 않을 권리와 다를 자유가 없다면 기회는 무의미하다."(대처)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