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페터 바이벨의 ‘다원성의 선율’(1986~1988)
①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페터 바이벨의 ‘다원성의 선율’(1986~1988)
현란한 빛과 묘한 음악으로 가득 찬 전시장, 그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서양의 명화, 그걸 배경으로 SNS용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 요즘 곳곳에서 열리는 ‘미디어아트’는 대개 이런 식이다. 고흐, 클림트 등 옛 거장의 작품을 색다르게 즐길 수 있는 점이 부각되면서 이런 ‘몰입형 전시’는 언제나 사람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지난 3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디어아트 전시는 다르다. 아름다운 이미지도 없고, 그 흔한 ‘SNS 인증샷 스폿’ 하나 없다.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작품도 많다. 그런데도 이 전시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60년대부터 인간이 컴퓨터, 비디오 등을 통해 어떻게 현실을 인식하는지를 예술로 표현해낸 ‘미디어아트계의 거장’ 페터 바이벨(79) 작품전이어서다.
② ‘알파벳 스페이스’(2017)
② ‘알파벳 스페이스’(2017)

“미디어는 관점을 생산한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세계적 미디어아트 센터인 독일 ZKM의 교류전이다. 작년까지 ‘ZKM 수장’을 맡은 바이벨의 회고전과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김순기 개인전을 맞바꿔 여는 방식이다.

바이벨은 예술과 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든 개념미술가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 빈대에서 의학과 수리논리학을 공부한 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는 곧 이런 인식 과정을 사진, 영화, 비디오 등 미디어 장치를 통해 풀어내기 시작했다.

바이벨에게 미디어아트란 인간의 ‘인식 과정’을 깊이 고찰하는 것이다. 회고전 제목이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이벨은 지난 2일 영상을 통해 “미디어는 감각기관의 연장선으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예술 작품의 아이디어가 됐다. 마이너스 부호(-)를 비추고 있는 두 대의 카메라를 조작해 스크린에 플러스 부호(+)를 띄움으로써 미디어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인식론적 비디오학Ⅰ’(1974)이 대표적이다.

두 개 층에 전시된 그의 작품을 눈에 담다 보면 ‘미디어 기술의 발전사’가 보인다. 1972년 그는 흡연하면서 뉴스를 읽는 앵커가 결국 담배 연기에 질식하는 영상 작품(소통은 매체다:텔레 액션)을 내놨다. 여기에서 담배 연기는 앵커의 말을 뜻한다. 대중매체의 언어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폐쇄성을 표현했다.

그랬던 그는 2017년 카메라와 컴퓨터가 관객의 신체를 스캔해 키, 나이, 머리 색깔 등 데이터를 분석하는 인터랙티브 작품(YOU:R:CODE)을 선보였다. 폐쇄적이던 미디어가 쌍방향의 데이터 중심으로 바뀐 걸 작품으로 보여준 것이다. 필립 지글러 ZKM 학예실장은 “바이벨의 작품은 인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고 말했다.

관객이 완성하는 작품

③ ‘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1973)
③ ‘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1973)
바이벨은 스마트폰, 증강현실(AR) 등 현대 미디어를 일찌감치 예견하는 등 ‘선구안’을 갖춘 작가이기도 하다. 라디오, 카메라, 무선 송수신기, 텔레비전 사진을 한데 합친 ‘인포메이션 유닛’(1967)이 그렇다. 60년 전 그의 상상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현실이 됐다. 자신의 눈과 입에 신문 광고 사진을 붙여서 여자처럼 보이도록 만든 뒤 찍은 ‘여자로서의 자화상’(1967)은 오늘날의 ‘셀피(selfie)’ 문화와 AR 필터를 연상케 한다.

개념미술인 만큼 어찌 보면 전시가 난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관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인터랙티브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지상 1층에 가면 카메라 3대, 모니터 3대로 이뤄진 원 안에서 관객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 1973)이 있다.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정면을 볼 수 없는 걸 체험하다 보면 ‘인간은 관점의 포로일 뿐 객관적 관찰자가 될 수 없다’는 작가의 의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관객의 몸짓에 따라 피아노가 음악을 연주하는 ‘음악 여행객’(2019), 특수 유리를 통해서만 책을 읽을 수 있는 ‘디지털 도서관: 디지털화의 3단계’(2017) 등도 흥미롭다.

홍이지 학예연구사는 “언제, 어디서든 미디어를 경험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미술관이 관객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 고민한 바이벨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전시는 5월 14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