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규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경기 이천 웰링턴CC 와이번코스 7번홀(파3)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이솔 한경디지털랩 기자
김일규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경기 이천 웰링턴CC 와이번코스 7번홀(파3)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이솔 한경디지털랩 기자
골프장을 평가할 때 골프 마니아들은 대개 이런 항목들을 따져 본다. 잔디와 그린을 잘 관리하고 있는지, 코스는 얼마나 다이내믹하게 설계했는지, 풍광은 어떤지…. 여기에 캐디의 전문성, 직원들의 서비스 수준, 클럽하우스의 ‘맛과 멋’이 평가 리스트에 더해진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명문’이란 수식어는 가질 수 없다.

경기 이천에 있는 웰링턴CC는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명문 클럽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골프장이다. 골프 전문지 골프다이제스트가 선정한 ‘대한민국 베스트 코스’ 랭킹에서 최근 두 번(2019~2020, 2021~2022) 연속 1위에 올랐다. “풍광, 코스 관리, 설계, 서비스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는 게 100여 명의 코스 평가위원들이 웰링턴CC의 손을 들어준 이유였다.

이런 골프장에 가는데 설레지 않을 골퍼가 있을까. 지난달 찾은 웰링턴CC는 첫인상부터 달랐다.

공을 살짝 띄우는 ‘사계절 푸른 잔디’

와이번코스 7번홀 그린을 둘러싼 에메랄드빛 해저드
와이번코스 7번홀 그린을 둘러싼 에메랄드빛 해저드
중부고속도로 남이천IC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웰링턴CC는 효성중공업이 운영하는 회원제 골프장이다. 생긴 지 8년밖에 안 된 ‘젊은 골프장’인데도 길고 굵은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들이 입구부터 골퍼들을 맞이한다. “대한민국 최고 골프장을 만들려면 조경도 그에 걸맞게 해야 한다”는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의 뜻에 따라 좋은 나무를 찾아 전국을 헤맨 결과다. 웰링턴CC에는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온 수십 년 수령의 팽나무도 있다.

클럽하우스에 차를 세우자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달려들었다. 발레파킹은 기본. 한 직원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는데도 보스턴백을 라커룸에 갖다줬다.

페어웨이와의 첫 만남도 색달랐다. 늦가을인데도 페어웨이는 파랬다. 그래서 ‘서양 잔디’로 알았는데, 첫 홀 세컨드샷을 치는 순간 그게 아니란 걸 알아챘다. 공이 땅에 달라붙는 서양 잔디와 달리 조선 잔디처럼 공이 살짝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웰링턴CC 관계자는 “한지형 서양 잔디 ‘라이 그래스’와 난지형 한국 잔디 ‘조이시아 그래스’를 섞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양 잔디처럼) 사계절 푸르면서 (조선 잔디처럼) 공이 뜨게 하라”는 조 명예회장의 주문에 따라 2년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페어웨이다.

이날 걸은 코스는 골프다이제스트 선정 1위 코스로 꼽힌 와이번과 그리핀 코스였다. ‘신의 축복이 내린 땅’이라는 의미의 웰링턴CC는 신화 속 동물인 와이번, 그리핀, 피닉스 등 27홀로 구성됐다.

명품 코스에 몸이 적응됐을 때쯤 시그니처홀을 만났다. 한폭의 그림과 같은 와이번 코스 7번 홀(파3). 폭포, 계류, 연못, 그리고 에메랄드 물빛이 일품인 아일랜드 홀이다.

‘TPC 소그래스’ 닮은 파3

이 홀이 ‘1등 골프장의 1등 홀’로 꼽히는 건 그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골퍼들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높은 난도도 이 홀의 ‘몸값’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이 코스를 그린 노준택 설계자가 난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택한 건 그린 크기를 줄이는 것이었다. 일반 그린보다 앞뒤, 좌우 폭을 각각 5m 이상 작은 25m 길이로 세팅했다. 그러니 티샷이 짧아도, 길어도 연못행(行)이다.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쳐도 물에 빠진다. 수많은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선수들이 티샷을 물에 빠뜨린 탓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악마의 파3홀’로 불리는 미국 플로리다주 폰테베드라비치의 TPC 소그래스 17번 홀(파3)을 연상케 한다.

화이트 티에서 핀까지 거리는 125m. ‘힘 빼고 툭 치자’는 생각에 평소 거리보다 한 클럽 짧은 9번 아이언을 들었다.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은 슬라이스 궤도를 타고 연못 한가운데 빠졌다. “둘 중 한 명은 빠뜨린다”는 캐디의 위로에 해저드 티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뿔싸. 해저드 티는 그린 근처가 아니라 깃발에서 55m 떨어진 곳에 마련돼 있었다. 골퍼들에게 아일랜드 홀의 ‘참맛’을 알려주기 위해 다시 한번 물을 건너야 하는 곳에 해저드 티를 설계했다는 설명이다. 56도 웨지로 날린 세 번째 샷은 핀 2m 옆에서 멈췄다. 하지만 3.0m 넘는 빠른 그린 스피드(스팀프미터 기준)에 지레 겁먹어 퍼터를 너무 살살 쳤다. 2퍼트, 더블 보기.

웰링턴CC는 이처럼 만만치 않은 홀로 가득하다. 페어웨이가 널찍한 홀에선 그린을 구겨놓고, 티샷이 떨어질 만한 지점에 벙커나 해저드를 숨겨놓는 식이다. 450m(화이트 티 기준)짜리 파5홀인 와이번 5번 홀이 딱 그렇다. 티샷을 페어웨이 정중앙에 보낸 뒤 우쭐해진 장타자들은 대개 ‘2온’을 시도한다. 하지만 상당수는 그린 주변 냇물과 연못에 공을 떨구며 고개도 함께 떨군다. 웰링턴CC에 ‘골퍼를 들었다 놨다 하는 골프장’이란 평가가 붙은 이유다.

와이번에 이어 도전한 그리핀 코스는 계곡과 능선 사이에 배치된 구릉지형으로, 상대적으로 편안했다. 피닉스 코스는 넓은 대지와 호수가 조화를 이루는 평원 코스다. 유럽의 정원을 거니는 듯한 라운딩을 마치고 보니 티오프부터 걸린 시간이 네 시간에 불과했다. 티오프 간격을 10분으로 넉넉하게 잡아 플레이가 밀리지 않은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라운딩 내내 앞이나 뒤 팀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웰링턴CC 회원권은 20억원(2020년 마지막 분양가 기준)이다. 그사이 골프 회원권 가격이 크게 올랐으니, 다시 분양하면 더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한다. 회원 수를 270명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홀당 최대 10명인 셈이다. 회원 자격을 내려놓으려면 웰링턴CC에 반납해야 한다. 회원권거래소를 통해 개인 간 거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회원권을 반납한 회원은 없었다. 골프다이제스트가 웰링턴CC를 1등으로 꼽은 이유는 차고 넘쳤다.

이천=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