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목걸이를 한 최준용 선수. /뉴스1
진주 목걸이를 한 최준용 선수. /뉴스1
#1. 이달 초 한 프로농구 선수가 2022~23시즌 개막을 알리는 기자회견(미디어데이)에 입고 나온 의상이 화제가 됐다. 지난 시즌 최우수선수(MVP) 였던 최준용 선수가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온 것. 남성적 이미지가 강한 운동선수인 터라 "이례적이다", "신기하다" 같은 반응이 나왔다. 최 선수는 자신의 의상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미디어데이 분위기가 항상 무겁고 재미가 없더라"며 "드레스 코드를 자유롭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 직장인 김인경 씨(29)는 최근 결혼을 앞두고 웨딩사진을 찍으면서 신랑과 같이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입었다. 평소 치마보다 바지를 즐겨입어 드레스보다 슈트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나다운 의상을 입고 찍은 웨딩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남녀의 틀을 깨는 젠더리스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했다.

성별 구분을 가로지르는 '젠더리스(Genderless) 패션'이 MZ세대(밀레니얼세대+Z세대) 사이에서 패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과거에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입는 패션이 존재했지만 '젠더리스 패션'은 여성의 레이스나 벨벳, 진주 액세서리, 남성의 넥타이나 슈트처럼 특정 성별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패션 아이템을 남녀구분 없이 착용하는 게 특징이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이처럼 올해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을 관통한 트렌드 중 하나가 '젠더리스'다. 질샌더, 펜디 등 런웨이에서 남성 모델들은 진주 목걸이와 천을 꼬아 만든 팔찌나 큼지막한 브로치 등을 차고 나타났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는 패션쇼를 아예 남성과 여성이 연이어 같은 옷을 입고 나오는 방식의 젠더리스 콘셉트로 꾸몄다.
배우 이정재가 밝은 분홍색 재킷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SBS 캡쳐
배우 이정재가 밝은 분홍색 재킷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SBS 캡쳐
국내도 예외가 아니다. 글로벌 스타로 떠오른 영화배우 이정재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진주 목걸이를 하고 나와 관심을 끌었다. 의상도 여성들이 선호할 법한 밝은 분홍색 재킷이었다. 스스로도 "청담동 사모님 같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복을 입은 듯한 모습이라 눈길을 끈 가운데 "고정관념을 탈피한 남자 패피(패션피플)"라는 반응도 나왔다.

남성이 진주 목걸이를 연출하는 모습은 패션 모델이나 연예인 사이에선 드물지 않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진주 목걸이 스타일링을 선보인 지드래곤을 비롯해 방탄소년단(BTS) 뷔, 그룹 위너 멤버인 송민호도 여러가지 길이와 굵기의 진주 목걸이를 레이어링한 패션을 연출했다.

대중에게도 이러한 트렌드가 퍼져 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진주 목걸이를 한 자신의 사진에 '남성 진주 목걸이' 같은 해시태그(#)를 달아 올리는 남성이 적지 않다. 반대로 여성은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하는가 하면 몸에 착 붙는 짧은 원피스가 주류를 이뤘던 기상캐스터 의상도 품이 넒고 길이가 긴 원피스나 바지 등 다양해지는 추세다.

집단보다 개성을 중시하고 소비에서 실용성을 추구하려는 젊은 세대 문화가 일상 패션에도 전파되면서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가 뚜렷한 전통적 분류법이 급속히 퇴조하는 경향과 맞물렸다는 분석. 업계에 따르면 매니시하고 강한 느낌을 강조하던 남성 브랜드들도 여성들 전유물로 인식되던 꽃무늬, 파스텔 컬러, 러플과 리본 등의 디테일을 가미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반대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던 여성 브랜드들은 남성이 입을 법한 오버사이즈 재킷과 코트, 통이 넓어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바지, 하이힐 대신 스니커즈를 주력 상품으로 밀고 있다.

기업들은 이미 소비자들을 잡기 위해 트렌드에 맞춰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최근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출생)를 겨냥한 젠더리스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샌드사운드'를 출시했다. 빈티지한 문자(레터링) 프린트를 적용한 스웨트셔츠, 로고 와펜(의류 등에 다는 자수 장식)과 자수를 적용한 인조가죽 점퍼, 다양한 색상의 후디·조거 팬츠 세트 등 성별 구분 없는 의류를 선보인다.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주'의 여성 속옷 제품. /자주 제공
신세계인터내셔날 '자주'의 여성 속옷 제품. /자주 제공
앞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도 서울 홍대 인근에 '나이키 스타일' 매장을 열면서 의류를 성별에 따라 구분하지 않는 젠더리스 매장을 꾸몄다, 총 3층 규모로 구성된 매장은 남성용·여성용이 아닌 스타일별로 아이템을 진열했다. '오버사이즈 S, '루즈핏 L' 등으로 상품을 구분해 각자 취향에 따라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운영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자주'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각팬티를 지난해 처음 여성용으로 선보였다. 회사 측에 따르면 여성용 사각팬티를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올해 생산량을 전년보다 20%가량 늘렸다. 내년 생산량은 약 30% 더 늘릴 예정이다.

단단한 와이어(철사)로 가슴을 옥죄던 기존 푸시 업 브라 대신 브라탑과 짧은 반바지 형태의 드로어즈 팬티를 즐겨입는다는 여성 직장인 한모 씨(28)는 "밖에서 걸어다닐 일이 많아 압박감이 없는 드로어즈가 활동하기 편하다. 활동성이 좋은 남성용 반바지나 맨투맨 티셔츠 등도 자주 사입는다"고 말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