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식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27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개막한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 전시에서 스승인 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솔  한경디지털랩 기자
서도식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가 27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개막한 ‘사유하는 공예가 유리지’ 전시에서 스승인 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이솔 한경디지털랩 기자
‘국가대표 금속공예가’이자 선진 금속공예 기법을 처음 들여온 선구자, 그리고 국내 첫 현대공예 미술관 설립자.

"유리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 공예는 없다"
고(故) 유리지 서울대 응용미술과 명예교수(1945~2013·사진)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한두 줄에 다 담을 수 없다. 10년 전 급성 백혈병으로 그가 떠났을 때, 온 미술계가 “거목을 잃었다”며 슬퍼한 것은 그만큼 유리지가 남긴 유산이 컸기 때문이다.

27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개막한 ‘사유(思惟)하는 공예가 유리지’는 2013년 작고한 유 작가의 발자취를 담담하게 그린 전시회다. 유족들이 지난여름 이 박물관에 기증한 고인의 작품 326점을 공개하는 전시다. 그가 한국 미술계에 남긴 작품 중에는 금속공예가 서도식(서울대 미대 명예교수·66)도 있다. 서 교수를 통해 유리지의 삶과 작품세계를 들여다봤다.

“한국 현대 금속공예, 유 선생이 시작”

1977년 국내 조형예술계의 가장 큰 화제는 한 젊은 공예가의 개인전이었다. 처음 보는 기법을 쓴 유려한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미국 템플대 대학원에서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공예를 공부하고 돌아온 유리지였다. 서울대 응용미술과 4학년이던 서 교수가 강사로 부임한 유 작가를 만난 게 바로 이때였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현대 금속공예를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걸 유 선생이 바꿨습니다. 섬세하고 유려한 곡면을 만드는 최신 기법을 들고 왔거든요. 지금은 금속공예과 1학년이 배우는 ‘다이포밍’(음각 틀을 만든 뒤 두드려서 반입체 모양을 형성하는 기법)도 유 선생이 처음 들여왔죠. 고인의 작품을 보고 ‘금속이 이런 모양이 될 수도 있구나’라고 충격을 받았던 게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 교수는 “유 작가가 1981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한국 현대 금속공예가 본격 시작됐다”고 했다. 한국 추상미술 거장 유영국 화백(1916~2002)의 장녀인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진학한 뒤 금속공예의 매력에 눈을 떴다. 당시 서울대에 금속공예 전공이 없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1969) 등 국내 상을 휩쓴 유 작가는 선진 기법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유학 시절에도 펜실베이니아 아트 페스티벌에서 공예부 수석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유 작가 작품의 특징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화려한 곡선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크리머’(1975~1976), ‘십장생과의 여행-수·수(水·壽)’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소녀 같은 성격이 녹아 있다”고 서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유 선생은 학생들에게 인기 최고였어요.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발랄한 성격 덕분에 남학생들의 선망 대상이었지요. 대학원 전공으로 산업공학과 금속공예를 저울질하던 제가 유 선생과 함께하려고 금속공예를 택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하하.”

전시에는 서 교수를 비롯한 제자들의 작품 10여 점도 함께 나왔다. “조그마한 오차, 틈새도 알아채고 ‘여기 이가 빠졌다 얘’ 하면서 정확하게 지적하셨어요. ‘핀 I’(1975)은 50여 년 전 작품인데도 지금 똑같이 재현할 수 있는 공예가가 몇 안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기법을 완성도 있게 썼거든요.”

유리지 유족, 서울시와 미술상 제정

‘삼족오’(2002)
‘삼족오’(2002)
경북 울진에서 태어난 유리지는 바다와 새 등 고향에서 본 서정적인 소재들을 많이 사용했다. ‘겨울섬’(1988), ‘밀물’ 등이 이런 작품이다. “유 선생 머릿속엔 항상 공예가 있었습니다. 어디서든 작품 소재를 발견했지요. 어느 날 제자들과 작업실에서 통닭을 먹다가 V자 모양 뼈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나는 여기서 새가 보여’라고 하셨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고는 V자 모양의 새를 작품에 넣으셨죠.”

말년에는 장례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유골함인 ‘골호-삼족오’(2002), 잔 등 장례용구인 ‘유수(流水)’(2010)가 대표적이다. “식기나 그릇 같은 일상용품보다는 목적성이 명확한 의미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서 공예의 격을 높이려고 하셨어요. 이 작품들은 일본,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05년 서울 우면동에 치우금속공예관(현 유리지공예관)을 짓고 작가상을 시상하는 등 공예의 위상을 높이는 데 온 힘을 쏟던 그는 2013년 급성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서 교수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다 건강을 해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유 작가의 유족들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서울시에 6억원을 기부하고, 격년으로 한국 유망 공예작가를 선발하는 ‘서울시 공예상’을 20년간 운영하기로 했다. 서 교수는 “돌아가신 뒤에도 한국 공예에 모든 것을 내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11월 27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