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74년 에미상 역사에서 처음 수상한 비(非)영어권 드라마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제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1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 세계 최고 권위의 방송 시상식 무대에 올라선 황동혁 감독은 유창한 영어로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는 이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 게임으로 ‘한국인 1호 에미상 감독상 수상자’ 타이틀을 갖게 됐다.

황 감독의 말 그대로 오징어 게임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한국 드라마 역사는 물론 에미상 역사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을 그렸다. 한국어로는 글로벌 시장을 절대 뚫을 수 없다는 ‘언어 장벽’과 서구권에선 결코 한국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화적 간극’을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관왕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가요(BTS의 아메리칸뮤직어워드 올해의 아티스트 수상)와 영화(‘기생충’의 오스카 작품상 수상)에 이어 드라마까지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K콘텐츠의 힘이 갈수록 더 세지고, 영향력도 확대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새 역사 쓴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은 지난해 9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자마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미국 LA시가 오징어 게임이 처음 방영된 9월 17일을 ‘오징어 게임의 날(Squid Game Day)’로 제정했을 정도다. 누적 시청시간은 22억8950만 시간. 역대 넷플릭스 TV쇼 부문 2위다.

非영어 드라마 최초…'오겜' 에미상의 주인공 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에미상 13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미상은 두 차례에 걸쳐 부문별 수상자를 발표하는데, 오징어 게임은 지난 4일 1차(크리에이티브 아츠) 시상식 때 4개 부문 상(게스트상, 시각효과상, 프로덕션디자인상, 스턴트퍼포먼스상)을 쓸어담았다. 그리고 이날 열린 메인 무대에서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추가로 수확했다.

이정재는 수상 직후 현지에서 연 간담회에서 그 공을 한국 시청자들에게 돌렸다. 그는 “항상 (수준 높은) 대한민국 시청자를 생각했기에 (수상이) 가능했다”며 “한국 시청자들이 지금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게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비영어권 작품은 수상 후보에도 올리지 않았던 에미상의 변신에 외신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뉴욕포스트는 “오징어 게임이 74년 에미상 역사의 승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LA타임스도 “그들은 단순히 ‘성대한 밤’을 보낸 게 아니라 ‘역사적인 밤’을 보냈다”고 전했다.

활짝 열린 K콘텐츠

드라마는 영화보다 해외 시장을 뚫기 어려운 장르로 꼽힌다. 러닝타임이 길기 때문에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2020년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 말한 ‘1인치의 장벽’(언어 장벽)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실제 영어권 시청자들이 자막을 보는 것을 기피하는 탓에 그동안 비영어권 드라마의 인기는 저조했다. 문화적 간극을 좁히는 일도 쉽지 않았다. 오징어 게임은 이 장벽을 가뿐히 깨부쉈다. 이정재는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언어가 유일하지 않다는 걸 (오징어 게임이) 보여줬다”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메시지를 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계에선 이번 수상으로 “K콘텐츠의 경쟁력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고 평가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작품만 좋으면 언어와 관계없이 글로벌 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걸 오징어 게임이 보여줬다”며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한국에 제대로 열렸다는 걸 알려주는 상징적 사건이자 신호”라고 분석했다.

한국 배우들의 실력을 세계에 알린 것도 에미상이 안겨준 선물 중 하나다. 이정재는 이 작품으로 글로벌 스타가 됐다. 이정재는 디즈니플러스가 만드는 ‘스타워즈’의 드라마 버전 ‘애콜라이트’의 주연으로 발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고상인 작품상은 오징어 게임의 라이벌로 꼽힌 HBO의 ‘석세션’에 돌아갔다. 석세션은 지난 1월 열린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도 오징어 게임을 제치고 작품상을 차지했다. 황 감독은 “작품상을 호명할 때 ‘S’로 시작해 ‘Squid Game’인 줄 알고 일어나려다 앉았다”며 웃었다. 그는 “기회가 되면 오징어 게임 시즌2로 작품상을 받아보고 싶다”며 “이게 저희의 마지막 에미상이 아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희경 기자/LA=서기열 특파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