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X책'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 저자·출판사 등은 달라도 곁들여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합니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의 한 장면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여름 빌딩 숲의 독자를 단숨에 잡아채 가을 달빛 흐드러지는 메밀꽃밭에 던져놓는다. 눈앞에서 장돌뱅이 셋이 줄지어 지나갈 것만 같다. 허 생원은 "장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하며 성 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 이야기를 시작하고, 곧 아비를 모른 채 태어나 자랐다는 동이가 자기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한 편의 서정시 같은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1936년 10월 잡지 <조광>을 통해 '모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공개됐다. 표준어가 바뀌도록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독자들에게 읽힌다. 80년 넘는 세월, 무수한 독자들은 똑같은 질문을 품었다. 동이랑 허 생원은 제천에 갔을까? 그러니까, 두 사람은 정말 부자(父子) 사이였을까?
'메밀꽃 필 무렵' 동이는 허생원의 아들이었을까? [책X책]
이런 호기심은 또 다른 창작을 낳는다. 최근 발간된 <대산문화> 2022년 여름호에는 김원우, 하창수, 전성태, 서수진, 이주란, 소유정 등 여섯 작가가 '메밀꽃 필 무렵'을 이어쓰는 특별기획이 실렸다. <대산문화>는 대산문화재단이 발행하는 문예교양지다.

'이어쓰기'이자 '다시 쓰기'다. 예컨대 소설가 서수진은 원작에서는 언급될 뿐 발화하지 않던 성씨 처녀를 화자로 채택했다. 성정순이라는 이름도 지어준다. 그녀는 허 생원 이전에 소운이라는 인물을 마음에 담았다. 동이는 사실 허 생원이 아닌 소운의 아들이다. 그녀를 뒤흔드는 건 태동뿐이 아니다. 소운과 허 생원을 향한 애증에 떠밀려 메밀꽃 사이로 쓰러진다.

1947년에 태어나 1977년에 등단한 중견소설가 김원우 작가부터 등단 4년차 소유정 문학평론가까지. 여섯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을 제각기 새로 읽어낸다.
'메밀꽃 필 무렵' 동이는 허생원의 아들이었을까? [책X책]
<대산문화>는 이처럼 선배 문인의 명단편을 이어쓰는 기획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닻을 올린 건 2015년 여름호.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제자와 후배 소설가들이 '소나기'의 감동과 여운을 이어갈 단편소설 다섯 편을 선보였다.

이 기획을 발전시켜 책으로 낸 게 <소년, 소녀를 만나다>(전상국 등 지음, 김종회·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 엮음, 원작 황순원, 문학과지성사)다.

작가의 면면이 화려하다. 전상국,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 노희준, 구병모, 손보미, 조수경. 등단 연차를 따졌을 때 50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국내 주요 작가의 글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황순원에게 직접 문학을 배운 제자, 혹은 그 제자에게서 문학을 익힌 제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황순원이 여전히 한국 문학의 거대한 스승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메밀꽃 필 무렵' 동이는 허생원의 아들이었을까? [책X책]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후배 문인들의 상상력을 좀더 즐기고 싶다면 <메밀꽃 질 무렵>(김도연 외 지음, 단비)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강원도 출신 작가 여섯 명이 '메밀꽃 필 무렵'의 여운과 감동을 이어받을 단편소설을 썼다.

이효석의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이다. 서울 유학으로 고향을 떠난 뒤 1942년 평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타향살이를 했다. 이효석의 '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향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면서도 그리운 것은 더 많이 들과 시냇물이다." 그가 내내 그리워했을 메밀꽃은 올 가을에도 새로 필 것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