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안성 한서당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서보문화재단 제공
1981년 안성 한서당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서보문화재단 제공
세계 미술계에서 10년째 ‘코리안 갤럭시’ ‘퍼펙트 스톰’이라 불리는 한국 단색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1970년대로 돌아가야 한다.

미술사에 처음 모노크롬(monochrome·단색화)을 도입한 작가는 20세기 초 절대주의를 주창한 우크라이나 출신 카지미르 말레비치다. ‘흰 바탕 위 검은 사각형’을 그렸다. 1945년 이후 피에로 만초니, 루초 폰타나, 이브 클랭 등이 모노크롬 작업을 했다.

1970년대 아방가르드를 이끈 한국 단색화는 모노크롬과 미니멀리즘 등 이전까지 미술계에 등장했던 특정 사상이나 사조에 얽매이지 않는다. 기법으로는 서구 미술적인 요소를 반영했지만, 동양적 선 사상이 더해졌다. 비슷한 시기 일본엔 ‘모노하(物派) 운동’이 있었다. 미셸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에서 출발한 운동으로 인간의 이성보다 물질이나 사물에 관심을 두는 게 핵심이다.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철학 공부를 하던 이우환 화백은 일본 모노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며 한국 단색화가들과도 교류했다. 1972년 한국에서 열린 미술전 제1회 ‘앙데팡당(Independant)’의 심사위원을 맡은 이우환은 박서보와 손잡고 한국 단색화를 일본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세대 한국 단색화가들은 차라리 수도자에 가깝다. 팔리지 않아도 그렸고, 비난받아도 그렸다. 정창섭, 윤형근, 김창열, 박서보, 이우환, 이강소 등 단색화가들은 6·25전쟁 당시 나이가 7세에서 23세였다. 학생이거나 군에 징집됐거나 전쟁으로 친구와 가족을 잃었다.

한국 단색화가들은 정치 격변기에 단색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부 민중화가는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을 쏟아부었다. 단색화가들은 절망 속에서 침묵으로 외쳤다. 스님이 독경하듯 몸으로 반복한 붓질은 화가들 스스로 수련과 구도를 통해 자신을 비워내고 채워간 결과물들이다.

물감을 바른 뒤 마르기 전 연필로 빗금을 그은 박서보, 캔버스 위에서 닥죽을 반죽해 그리는 정창섭, 마대 뒷면에 두꺼운 물감을 바르고 앞면으로 밀어낸 하종현, 청색과 갈색 물감을 면포나 마포 위에 반복적으로 칠해 번지게 한 윤형근, 고령토를 바른 뒤 선을 긋고 뜯어내고 메우길 반복한 정상화의 기법은 모두 저마다의 세계를 구축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