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현 화백이 국제갤러리에 전시한 자신의 작품 ‘이후 접합 10-2’를 설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하종현 화백이 국제갤러리에 전시한 자신의 작품 ‘이후 접합 10-2’를 설명하고 있다. 국제갤러리 제공
“평생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어요.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세상을 떴고, 살아있더라도 아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늘이 내게 여전히 작품을 할 수 있는 힘을 줬다는 건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뭔가 새로운 것을 열심히 해보라는 뜻이겠지요.”

단색화 거장 하종현 화백(87)은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5일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Ha Chong-Hyun(하종현)’ 기자간담회에서다. 2019년 이후 3년 만에 마련한 그의 개인전에는 신작 20여 점을 비롯해 총 40여 점이 걸렸다. 전매특허인 ‘접합(Conjunction)’ 연작과 여기에 색을 가미한 ‘다채색 접합’ 연작, 신작인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연작 등이다.

접합 연작은 1970년대 중반 마대 뒷면에 물감을 바른 뒤 밀대로 짓이겨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背押法)을 고안하면서 시작됐다. “6·25전쟁이 끝난 뒤 미술 공부를 하는데 캔버스가 너무 비싸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어요. 궁리를 거듭하다 이중섭이 담뱃갑 종이에 은지화(銀紙畵)를 그렸듯이 나도 텐트 천이나 마대 등 다른 재료에 작품을 해봐야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올 사이 구멍이 너무 커서 도저히 그림을 그릴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뒤에서부터 물감을 칠해서 앞으로 밀어붙이는 작업을 시작한 거지요.”

‘그림은 캔버스 앞면에 그리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한 그의 작품에 세계는 열광했다. 국제 미술계는 하 화백을 박서보·정상화와 함께 한국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대표 화가로 꼽는다.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와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미술관 등 각국 주요 미술기관도 앞다퉈 그의 작품을 사들였다. 오는 4월 21일부터 8월 24일까지는 이탈리아 베니스 팔라제토 티토에서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다. 현대미술 최고 권위의 베니스 비엔날레가 승인한 공식 병행 전시다.

독창적인 화풍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안주할 법도 하지만 그는 정체(停滯)를 단호히 거부해왔다.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무채색만 사용하던 그가 단색화의 틀에서 벗어나 작품에 다채로운 색을 가미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 다채색 연작은 마대 앞면에 검은색을 칠하고 뒷면에 하얀색 물감을 칠해 밀어낸 뒤, 앞면에 다시 흰색 물감을 올리고 그 위에 색을 칠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복합적인 색조는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한 매력을 발산한다.

‘이후 접합’ 연작은 회화와 오브제의 접합을 통해 평면의 틀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다. 하 화백이 2010년경부터 시작한 작업 방식이다. 나무 합판을 자르고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으로 나뭇조각들을 하나하나 감싼 뒤 화면에 배열해 제작했다.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과 앞면에 칠하고 주걱으로 밀어낸 물감의 질감, 합판 사이로 밀려난 물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야말로 정중동(靜中動)이다.

하 화백은 “그렇지 않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 작품인데, 사람들이 겨우 이해를 해서 팔린다 싶으면 다른 짓을 해서 안 팔리는 작품을 만든다고 아내에게 한소리 듣기도 한다”며 “하지만 한자리에 가만히 있기가 정말 싫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방가르드”라고 말했다.전시는 내달 1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