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허문찬 기자
사진=허문찬 기자
지난달 17일 경기 성남 티엘아이아트센터에서 특별한 무대가 펼쳐졌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59·사진)과 그의 제자 문지영(25)이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작품집’을 들려줬다. 김 총장의 손과 문지영의 손이 파드되(2인무)를 추듯 피아노 위를 뛰놀았다. 둘의 화음은 관객을 홀렸다. 김 총장에게도 뜻깊은 연주였다. 앞으로 4년 동안 음악회를 멀리할 계획이라서다.

지난 8월 선임된 김 총장은 한예종 개교 이후 처음으로 교직원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됐다. 교직원과 학생은 물론 청소노동자까지 한 표씩 행사했고 김 총장의 득표율은 68%에 달했다. 총장이란 영예를 얻었지만 그는 아쉽다고 했다.

“휴가 갈 때도 악보를 챙길 정도였는데 당분간 학교 주최 음악회가 아니라면 연주를 자제해야죠. 저는 이제 예술가가 아니라 행정가로 거듭나야 하니까요. 연습 횟수가 줄어서 연주력이 쇠퇴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총장실 한쪽에 피아노를 놓았다. 틈틈이 손가락을 풀겠다는 것. 전공이 다른 교직원들과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김 총장은 평생 피아노와 함께 살아왔다. 여덟 살 때 처음 피아노를 친 뒤로 11세에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과 협연했고 23세에 미국 클리블랜드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94년 한예종 교수로 부임한 뒤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08년부터는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변신해 2017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그해부터 창원시립교향악단을 상임지휘자로서 이끌다가 한예종 총장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다.

김 총장은 제자들 사이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하다. 약점을 분석하고 보완할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서다. 그 결과 제자들은 콩쿠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뤘다. 반클라이번 콩쿠르와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각각 2위에 오른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비롯해 아시아인 최초로 리즈 콩쿠르를 제패한 김선욱,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문지영, 올해 부조니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박재홍까지 모두 그의 제자다.

제자들이 콩쿠르에서 우승해도 그는 노심초사했다. 연주자들의 실력에 비해 국내 예술시장이 작아서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으려면 콩쿠르 입상 경력을 ‘스펙’ 삼아 내세워야 한다. 트로피 사냥꾼처럼 계속 콩쿠르에 나가는 이유다. “한국은 콩쿠르에서 과실(우승)만 챙겨가고 교류는 안 한다”는 볼멘소리가 유럽에서 나온다고 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아 대회 역사서를 훑어보는데 역대 우승자들마다 공연 경력이 화려해요. 한국인 우승자들 소개란은 휑하죠. 공연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공연장도 해외 공연장과 함께 무대를 마련하고 지속적으로 교류해야 지금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어요. 최근 한국인 심사위원들에게만 허름한 숙소를 배정하는 등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요.”

예술에 관한 투자 없이 연주자의 개인기로 승부하는 건 한계가 뚜렷하다는 설명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국제 콩쿠르는 110여 개. 매년 10여 명의 우승자들이 쏟아진다.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개인의 기교만으론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다. 김 총장은 “혼돈의 시대가 시작됐다. 예전 같으면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기획사들의 계약 요청이 쏟아졌는데 지금은 개성이 없으면 도태된다”며 “글로벌 공연기획사들도 콩쿠르 경력 대신 자기만의 색깔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말은 쉽지만 교육은 어렵다. 본인조차 모르는 개성을 선생님이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김 총장도 교수 생활을 하며 늘 고민했던 부분이다. “교수 시절 후배인 손민수 한예종 교수에게 하소연했어요. ‘나 이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요. 학생들 창의력을 개발하는 길이 참 고되더라고요. 문득 제 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니 답이 나왔어요.”

참조할 연주 영상도 부족했고 악보도 구하기 어려웠던 학창 시절, 그는 작품 해석에만 주력했다. 김 총장은 모두가 명연주자를 따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남는 길은 ‘융합’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인접한 예술 분야와 상호교류하며 자기 색을 찾는 게 예술가로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며 “장르마다 겹겹이 쌓인 벽을 허물고 예술을 체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음악원 교수에서 총장이 된 그는 학생들이 뛰어놀 판을 깔아주려 적극 나선다. 음악원·연극원·영상원·무용원·미술원·전통예술원 등 6개 예술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프로젝트를 기획할 예정인데, 창의성을 이끌어내되 개입은 최소화할 거라고 했다. “서로 엮이며 경험이 쌓여야 예술이 융화되는 것이지 강제로 융합한다고 어우러지진 않아요. 자기 전공을 어설프게 배우고 협업하는 건 안 됩니다. 깊이 있는 예술이라야 지평을 넓힐 수 있어요.”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