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파낸 '발굴 조각' 어린왕자의 멋
돌로 된 어린왕자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서 있다. 프랑스 소설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왕자》 속 삽화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다. 눈에 띄는 건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목도리다. 중력을 거스르며 곧게 뻗은 긴 목도리가 자칫 평범하고 밋밋할 수 있는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조각 곳곳에 박힌 유리와 돌, 도자기 파편 등도 독특한 매력을 더한다. ‘발굴 조각가’ 이영섭의 ‘어린왕자’(사진) 연작이다.

서울 사직동 갤러리마리에서 이 작가의 개인전 ‘아틀란티스에서 온 어린 왕자’가 열리고 있다. 작가가 어린왕자와 제주도 돌하르방, 천사 등을 모티브로 제작한 조각 20여 점 등 총 42점의 작품을 내놨다.

이 작가는 맨땅에 밑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따라 흙을 파낸 뒤 그 속에 자신이 개발한 혼합재료를 붓고 유리·보석·백자·분청사기 파편·돌 등을 넣은 다음 흙으로 덮는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재료가 굳으면 흙 속에 묻힌 조각을 파낸다. 재료를 깎아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땅에서 파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조각에서는 오랜 세월이 녹아든 유물 같은 느낌이 난다. 작가는 “바닥에 음각으로 조각을 하고 무언가를 흘려보낸다는 점에서 양각인 서구의 조각과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친근하고 질박하면서도 세련미가 있다. 일반적인 조각 방식으로 재료를 깎아내서는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조형과 질감 덕분이다. 전시장에서는 금덩어리 같은 광물이 박힌 거대한 방망이를 든 작은 도깨비, 가슴에 푸른 보석이 박힌 천사 등을 묘사한 작품들이 다른 어떤 조각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매력을 선사한다. 돌담과 원담, 바다 등 제주 풍경을 담은 평면 작업도 처음으로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오는 24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