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핑 베토벤' 中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 사진=한경DB
영화 '카핑 베토벤' 中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 사진=한경DB
"지난 2년 내 삶은 공허하고 슬펐으나, 지금에야 사랑하는 여성으로 인해 행복한 순간을 맞고 있네. 다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나와 신분이 다르네. 당연하게도 그녀와 결혼은 할 수 없겠지." -1801년 베토벤이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中
청년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혼인 절벽'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자체를 잃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처럼 격렬히 연인을 아끼다가도 취업, 내 집 마련 등의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혀 결혼을 늦추거나 끝내 자신의 인생에서 결혼을 제외하는 일이 발생하는 탓입니다.

올해 상반기 혼인 건수는 9만6265건으로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10만건을 밑돌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을 감안하더라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1990년대 연간 30만건을 크게 웃돌던 혼인 건수는 2016년 20만대로 하락한 뒤 가파른 속도로 감소하면서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실과 맞닿은 어려움을 견디다 결국 자신의 연인과 이별을 결심하는, 자신의 욕심이 연인의 불행을 뜻하지 않길 바라는 처절한 마음을 어느 누가 비판할 수 있을까요. '혼인 절벽'이라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아닌 그들 개개인의 심경과 경제 상황 등을 면밀히 살핀다면, 혼인을 포기하는 현 세태의 아픔은 결코 누구도 가볍게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갈 무렵 자신의 연인에게 헌정한 작품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단조 '월광''을 이 시점에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던 그녀와 신분 차이, 청력 질병 등의 현실적 이유로 이별을 맞게 된 베토벤의 절망감이 결혼을 포기하는 세대에세는 더 아리게 다가옵니다. 월광 소나타가 전하는 울림은 그 어느 때보다 먹먹한 감정으로 느껴집니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끝없는 암흑과 극한의 고통을 호소하는 음악,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악성' 베토벤, 가혹한 운명 속 세기의 명작을 쏟아내다

먼저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유일한 음악가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그가 지닌 음악적 재능은 타종을 불허할 정도였죠. 8세에 처음으로 피아노 독주회를 연 베토벤은 작곡가의 역량을 드러내듯 즉흥 연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당시 최고의 음악가로 자리한 모차르트가 17세가 된 베토벤의 피아노 즉흥 연주를 듣고 "이 친구에게 주목해야 한다. 베토벤은 언젠가 온 세상이 주목할 인물이 될 것"이라는 극찬한 일화는 유명하죠.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그러나 베토벤의 위대함을 단순히 천부적 재능의 결과로 설명하기엔 부족합니다. 가혹한 운명 속 개인의 불행과 비극을 찬란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 베토벤입니다. 그는 정신과 세기가 지나도 가치가 변치 않는 불멸의 음악을 탄생시킨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는 음악 신동이란 타이틀로 돈을 벌고자 했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끊임없는 연습 및 연주 종용은 물론 폭력까지 일삼았던 아버지로부터 베토벤은 역경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를 사랑으로 보듬었던 어머니는 베토벤이 17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말죠.

이후 빈에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명성을 높이던 베토벤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드리웁니다. 26세 젊은 나이에 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이후 베토벤은 청각 장애로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밤과 낮이 없이 울려대는 환청과 통증에 괴로워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고 청력 상실을 들킬까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죠. 1801년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는 청각 장애를 견딜 수 없었던 베토벤은 깊은 우정을 나눴던 의사 베겔러와 목사 아멘다에게만 이를 고백했다고 알려집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고통이 쏟아졌을 때 명작은 연이어 탄생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 '비창', 제14번 c#단조 '월광', 제23번 f단조 '열정' 등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를 비롯한 교향곡 제5번 c단조 '운명', 제6번 F장조 '전원', 제9번 d단조 '합창' 등 세기의 걸작을 남기죠. 이 모든 작품이 베토벤의 청력 상실이 시작된 1796년 이후에 쓰인 음악이란 점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입니다.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월광 소나타'는 베토벤 특유의 감성이 극대화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월광'이라는 곡명은 베토벤이 아닌, 음악 평론가 레루슈타프가 베토벤 소나타 제14번 c#단조 1악장을 두고 "달빛이 비친 루체른 호수 위에 떠 있는 조각배 같다"고 문학적 비유를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베토벤이 작품에 새긴 부제는 'Sonata quasi una Fantasia(환상곡 풍의 소나타)'로, 형식뿐 아니라 내면의 감정까지 자유롭게 표현하라는 메시지를 남겼죠.

이 작품은 당시 베토벤의 연인이었던 귀족 신분 줄리에타 귀차르디에게 헌정한 곡으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를 두고 '월광 소나타'가 베토벤이 청혼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란 주장도, 귀차르디에 대한 실연을 노래한 비가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사진=한경DB
우선 베토벤이 원보에 직접 자신의 연인에게 선사한 작품이란 점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별 이후보다는 이전에 쓰인 곡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혼을 위한 곡이라고 하기엔 작품 전반에 깔린 절망적인 분위기, 적막하다 못해 쓸쓸한 곡조와 모순되는 면이 적지 않죠.

귀차르디에 대한 사랑이 매우 열정적이었으나 신분 차이와 청력 질병 등의 이유로 그녀와의 결혼이 어려울 것을 직감한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로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작곡 시점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작성하기 바로 전년도이자, 자신의 귓병이 되돌릴 수 없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무렵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한 여자를 지독히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불행에 발을 들이지 말 것을 경고하는 절절함과 귀차르디에 대한 이별이 가슴에 사무쳤을 베토벤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긴 작품이라 본 게 기자의 관점입니다.

유년 시절부터 57세 눈을 감기 직전까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던 베토벤에게 찬란함 그 자체였던 사랑과 가슴 저린 헤어짐에 함께 할 준비가 됐다면 '베토벤 월광 소나타 1악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담담하게 내뱉는 이별의 고통…가슴 저리는 '처절함' 극대화

'헤어짐의 시간' 오른손이 셋잇단음표로 된 아르페지오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베토벤의 감성이 살아있는 묵직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선율이 시작됩니다. 이때 낮은 음역에서는 화음을 순차적으로 하향시키면서 암울하면서도 절망감에 휩싸인 듯한 분위기를 표현하죠. 베토벤은 악보에 'Si deve suonare tutto questo pezzo delicatissimamente e senza sordino(댐퍼(약음기) 없이 극도의 섬세함을 표현하라. *댐퍼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는 현대에 와서 '페달을 사용하라'는 의미로 통용된다)'고 적어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주자가 표현할 수 있는 극단의 감정을 아주 세밀하게 끌어낼 것을 직접 지시했습니다.

전반적인 곡조가 깔리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 멜로디가 등장합니다. 동일한 음을 다른 리듬으로 세 번씩 반복하는 연주는 사람이 건네는 목소리와 비슷해 더욱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나는 괜찮아요'라고 읊조리는 듯 느린 템포로 선율이 이어지나, 중간중간 북받치는 감정이 새어 나오 듯 낮은 음역에서 어두운 음색이 드리웁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단조 '월광'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출처=크레디아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단조 '월광'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출처=크레디아
'날 두고 가지 마세요' 이내 차분하면서도 가슴 아린 멜로디는 윗성부와 아랫성부가 상행과 하행을 반복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윗성부가 먼저 올라가는 선율을 표현하면 낮은 음역이 이를 잡듯 올라가며, 함께 하행했다가 같은 음형을 반복하는 부분은 베토벤의 내면에 혼재된 갈등을 표현하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마음과 그녀를 잃고 싶지 않은 심정이 부딪히면서 거대한 갈등이 생겨났다 잦아드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격화된 감정은 선율이 하향하면서 억지로 누르듯 제어되죠.

그러면 낮은 성부에서 G# 음이 페달을 통해 무거운 분위기를 지속하고, 윗성부에서 화음이 펼쳐지면서 신비로우면서도 궁금증을 일으키는 선율이 펼쳐집니다. 안개가 낀 듯한 음색을 지나오면 처음에 나온 대표 멜로디가 다시 등장하는데, 기존 c#단조가 아닌 E장조로 전조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찬란했던 우리의 순간' 단조에서 장조로 변화하면서 작품에서 보기 힘든 밝은 선율이 나타납니다. 동일한 음형을 가지고 전혀 다른 색깔을 표현하면서 행복과 기쁨에 가득 찼던 순간을 회상하듯 표현합니다. 암울하기보다는 따뜻하고 햇살이 비추는 듯한, 연인과 가장 아름다웠을 시간을 보여주는 선율은 잠시만 드리웠다 이내 사라집니다. 금세 단조로 돌아오면서 어두운 음색이 드리우는 시점은 꿈만 같던 순간과 대비돼 더욱 가슴을 아리도록 하죠.

'이제 날 떠나가세요' 베토벤의 감정을 그대로 담은 대표 멜로디는 곡의 종결구에서 아주 낮은 음역으로 다시금 등장합니다. 더없는 쓸쓸함, 절망감을 베토벤이 직접 읊조리는 듯한 선율은 높은 음역의 아르페지오와 대비되면서 주변 공기 전부를 침울하게 만들 정도의 거대한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그대로 선율은 끝없이 하강하고, 데크레센도와 피아니시모를 거쳐 멀리 떠나가듯 줄어듭니다. 이내 어둠의 감정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듯 모든 선율이 멈추며 고요하게 막을 내립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단조 '월광'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출처=크레디아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단조 '월광'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출처=크레디아
c#단조의 서글픈 음색으로 누구보다 쓸쓸하고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감정을 내뱉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베토벤의 작품에서 보기 힘든 서정적인 선율에 격정적인 분위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그의 아픔을 나눠 겪는 듯한 경험을 자아내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아침을 깨우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사소한 일상을 속삭이는 보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조차 버거운 오늘, 음악이 전하는 처절함은 어느 때보다 아픈 선율로 다가와 마음 저리기만 합니다.

오늘만큼은 불안정한 삶에 대한 고뇌와 인생에 대한 책임감, 부족한 자신을 향한 자책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청년이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만 감내할 수 있길 바랍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치면서도 불행만은 함께하고 싶지 않았던 모두에게 찬란한 기억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