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학살
한국에서의 학살
“피카소가 왜 천재인가요?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데.”

포털사이트 질문 코너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질문이다.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성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대중의 눈에 비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은 ‘이상한 그림’이다. 눈·코·입이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얼굴, 신체 비례를 벗어나 뒤틀린 몸,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한 화면 구성….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은 물론 한 세대 위 화가인 고흐, 고갱과 비교해도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피카소는 10대 때부터 이미 대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천부적인 묘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구상화를 못 그린 게 아니라 안 그렸다는 얘기다. 한 화가가 자신의 극사실주의 그림을 들고 와 “당신의 그림은 마구잡이”라고 힐난하자 피카소가 몇 분 만에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 응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위대함은 ‘돈 되는 그림’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었는데도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현대미술의 바탕을 만들어낸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 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천재성을 체감할 수 있는 감상법을 소개한다.

끊임없는 도전, 입체주의에 이르다

피카소의 작품은 한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시기별로 극명하게 다르다. 당시 미술 사조와 피카소가 처한 상황 등을 알면 작품을 더 재미있게 감상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피카소가 20세 때 그리기 시작한 ‘파라렐로의 콘서트 카페’(1900~1901)다. 당시 약관의 청년이었던 피카소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었다. 무용수보다 관객을 강조하고 좌우 화면 끝 인물을 과감하게 잘라낸 이 그림에서는 새로운 구성에 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다.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시작으로 입체주의 시대를 열었다. 전시에 나온 ‘만돌린을 든 남자’(1911)는 대상을 기하학적 요소로 분할하고 해체하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서는 만돌린과 남자의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입체주의가 심화되면서 추상주의와 분간이 어려워지자 피카소는 좀 더 알아보기 쉬운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구상성을 가미한 종합적 입체주의 작품인 ‘콧수염이 있는 남자’(1914)가 그 결과물이다.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
파란 모자를 쓴 여인의 상반신
입체주의는 피카소가 예술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입체주의 그림은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미술계 최대 발명으로 꼽히는 원근법을 깡그리 무시했다. 당시 미술가들에게 경전과도 같았던 기존의 틀을 깨부수면서 근대 서양미술의 주요 사조인 모더니즘이 시작됐다.

사회참여 도구가 된 미술…말년까지 도전 거듭

피카소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은 입체주의 그림을 통해 또다시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그가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담은 ‘게르니카’(1937년)를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식품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피카소의 반전 예술로 인해 미술은 사회 참여의 도구로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반전 예술 중 ‘한국에서의 학살’(1951)을 감상할 수 있다.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이 작품은 ‘게르니카’,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린 ‘시체 구덩이’(1944~1946년)와 더불어 피카소의 반전 예술 3대 걸작으로 꼽힌다.

피카소는 매체도 가리지 않았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는 동판에 에칭 기법으로 그림을 새겼고, 1946년부터는 도예 작업을 시작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수천 점의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두 팔을 벌린 여인’은 1957~1965년 사이에 철판을 절단하고 구부려 만든 조각들 중 하나다. 피카소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창작혼을 불태웠던 증거로 남아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