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희 ‘Sealed Smile’
김지희 ‘Sealed Smile’
전 인류가 1년 넘게 감염병에 신음하고 있는 지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정적이다. 국가 간 경계를 넘나들던 여행도, 마스크 없이 맨 얼굴을 마주했던 일상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모두 숨죽여 지내는 시기, 그렇다고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과 희망, 추억으로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한경갤러리에서 22일 기획전 ‘Still Life’를 시작한 최재혁(왼쪽부터), 김지희,이태수 작가. 신경훈 기자 shin@hankyung.com
한경갤러리에서 22일 기획전 ‘Still Life’를 시작한 최재혁(왼쪽부터), 김지희,이태수 작가. 신경훈 기자 shin@hankyung.com
여기, ‘그래도 인생이다(Still life)’라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22일 기획전 ‘Still Life’를 시작한 김지희(37), 최재혁(38), 이태수(40)가 주인공이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묵묵히 구축해온 이들은 동양화, 서양화, 조각 등 27점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존재와 욕망, 희망을 이야기한다. 장르와 기법, 재료의 변주를 통해 선사하는 반전은 생기 잃은 일상에 깜짝 선물처럼 다가온다.

전시 주제 ‘Still Life’는 정물화를 뜻한다. 동시에 ‘그래도, 여전히 인생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지희는 화려하게 꾸민 커다란 안경을 쓰고 살짝 웃고 있는 인물을 그린 ‘Sealed Smile’ 연작을 내걸었다. 화려하고 현대적인 이미지와 달리 김지희의 작품은 동양화다. 한지 위에 전통 안료를 입혀 현대인의 욕망을 섬세하게 투사한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웃고 있되 어느 정도로 기쁜지 알 수 없고, 눈마저 커다란 안경에 가려져 있다. 치아 교정기도 작품에서 즐겨 사용하는 장치다. 철사와 고무줄로 치아를 이동시키고 고정시키는 교정기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추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사회에서 학습된 욕망을 따라가는 현대인을 통해 한 편의 정물화처럼 박제된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김지희가 그리는 욕망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백호와 흰 부엉이가 커다란 왕관을 쓰고 있는 작품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백호와 흰 부엉이는 복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진 상서로운 동물들이죠. 여기에 화려한 왕관을 얹어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바람을 담았어요. 지금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또다시 내일을 향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욕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닐까요?”

최재혁 ‘Still life #81’
최재혁 ‘Still life #81’
서양화가 최재혁은 고가구와 도자기, 빈티지 자동차 등 골동품을 재조명한다. 반짝이는 신상품의 뒤편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버려질 날만 기다리던 사물들이 최재혁의 붓을 거치면서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최재혁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이용하지만 그 누구보다 동양적 정서를 펼쳐낸다.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처럼 사물을 지그재그로 배치해 시선을 이끄는가 하면, 책가도(冊架圖)처럼 각각의 화면을 분할해 사물을 배치하기도 한다. 그의 정물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다. 과거의 골동품을 현대로 불러내 새로운 서사를 불어넣는다. “골동품은 지나간 일상을 되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어요. 동양 정물화의 기법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실험을 계속 이어갈 계획입니다.”

이태수 ‘H beam cut’
이태수 ‘H beam cut’
조각가 이태수가 내놓은 ‘H빔’은 한경갤러리에 전에 없던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공사장에서 뚝 떼어온 듯한 이 오브제는 가는 철사 한 줄에 몸을 맡기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 언제 떨어질까 불안감을 조성하며 보는 이들을 흠칫 놀라게 하지만 이 오브제의 정체는 스티로폼이다. 표면 마감작업의 장인으로 꼽히는 이태수가 노리는 것도 이 대목이다.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저에게 예술이란 허상의 이미지를 통해 가치 없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내는 과정이거든요. 모방과 재현을 통해 오브제가 줄 수 있는 변주와 반전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세 작가의 작품들은 말한다. 결국은, 그래도 인생이다. ‘인생 만세!(Viva la vida!)’ 전시는 4월 15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