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생애 첫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17일 출간

인간 박용만의 그늘과 사람, 관계,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 산문으로 처음 고백
박용만 "기간제 사원 선아씨, 그때는 내가 소심했다오"

"살다 보면 양지아래 그늘이 있었고, 그늘 안에도 양지가 있었다. 양지가 그늘이고 그늘이 양지임을 받아들이기까지 짧지 않은 세월이 걸렸지만, 그게 다 공부였지 싶다. 그걸 깨닫고 나니 양지가 아닌 곳에 있는 순간에도 사는 것이 좋다"

박용만 "기간제 사원 선아씨, 그때는 내가 소심했다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66·사진)이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마음산책)의 머리말에 쓴 내용이다. 17일 출간된 그의 생애 첫 책이다. 박 회장은 소비재 중심의 두산을 인프라 지원사업 중심의 중공업그룹으로 변모시키는 여러 인수합병을 이끌고, 7년여간 대한상의 회장을 맡으며 샌드박스로 신기술 사업화를 성과로 남긴 기업인이다.

산문집은 어린시절 일화로 시작해 성장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린 여타 자서전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회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내려놓고, 글쓰기를 좋아하고, 때론 요리사로, 사진작가로, 주말엔 자원봉사자라는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인간 박용만'을 내세운다. 단순히 경영인 박용만이 겪은 일의 경험 뿐만아니라 그의 이면에 자연인 박용만이 어떤 활동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가감없이 풀어냈다.
인간 박용만의 '그늘'
책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를 회장 취임식 날이 아닌 '아내와 김치밥을 해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어제 저녁'이라 고백하면서 시작한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품위있게 먹는 스테이크 대신 짬뽕 국물을 옷에 튀겨가며 먹고, 늦은 저녁 주걱으로 찬밥을 한덩이 떠 고추장에 찍은 생멸치에 한 숟갈 먹는 박용만의 모습을 가장 먼저 비춰낸다.

근엄함을 내려놓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사람들과 농담어린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결코 소탈해 보이려거나 기업 총수로서 고정관념을 깨려는 준비된 행동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박 회장은 책을 통해 "내 삶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그것이 불편하면 내가 삶을 바꾸면 될 일이지, 바꾸지 않으며 감추거나 포장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제목에 드러나듯 박 회장은 이번 산문집에 그의 빛과 성과만을 기록하지 않았다. 철저히 어두웠던 과거까지 조명한다. 기업 총수로서 꺼내기 힘든 가족사를 책 전반부에 소개한 것 역시 그 그늘이 있었기에 현재 자신이 존재한다는 확고한 생각 때문이다. 그가 18살이던 시절,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뒤 배다른 큰 형(고 박용곤 전 두산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너는 내 동생이다"라는 말을 듣는 장면은 우리가 알던 삭막하고 혹독한 대기업 총수 일가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박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1978년 두산이 아닌 외환은행에 입사한다. 하지만 미국 보스턴대 MBA를 마친 박 회장에게 그룹 일을 맡기는 셋째 형(박용성 회장)의 제안 역시 배다른 혈육들이 회사 쟁탈전을 벌이는 드라마속 이야기와는 다른 장면이다. 박 회장은 "어렵고 절박한 사람들이 겪는 불안함은 아니었지만 의존할 곳 없고 정해진 삶의 길이 없었던 게 오히려 독립심과 적극성을 갖게 됐고, (가족 내) 기득권이 없으니 스스로 균형감을 갖는데 도움이 됐다"며 "결과적으로 내게 주어진 축복이었다"며 가족사를 되려 긍정한다.

그 외에도 정략결혼 대신 초등학교 시절 만난 첫사랑 소녀를 결국 지금의 아내로 맞이 한 사연, 대기업 총수 아들이었음에도 반지하 아파트에서 시작했던 유학시절, 세 번의 고통스런 허리 수술을 이겨내며 얻은 기억들, 사진작가를 꿈꿨지만 아버지 반대에 꿈을 꺾어야했던 젊은 시절 등 사소한 삶의 흔적 들을 하나하나 곱씹는다.
변화보다 중요한 '사람'의 소중함
69개의 길고 짧은 이야기를 통해 박 회장은 치적과 성과 대신 일이든 관계든 최선을 다하되 긍정을 잃지 않는 여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휴머니스트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특히 '젊은 친구들'인 신입사원들을 향한 그의 각별한 애정은 산문에서도 묻어난다. 매년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 부모님들에게 일일이 '자식처럼 잘키우겠다'는 편지를 전달하고, 말단 사원들과도 메일로과 메신저로 일과를 공유하고 소통한다. 이런 박 회장에게 직원들이 '아버지' 또는 '회장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그는 행복함을 느낀다고 했다.

두산 직원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둔 여성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 결국 결혼을 성사시킨 사연부터 '회장님 식사하셨어요?'라는 메일로 시작해 2년간 메일로 짧은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던 기간제 여사원의 불가피한 퇴직을 막아줄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도 고백한다. "그의 재계약에 개입하면 나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을 내 재량으로 예외를 만드는 일이었다. 부당한 재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선아라는 예쁜 이름의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게되면 '내가 소심해서 그랬다'는 고백만이라도 전했으면 좋겠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음에도 2015년 논란이 됐던 신입사원 희망퇴직 사건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과 속내에 대해서도 처음 입을 열었다. 그는 "어린 사원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내 뜻을 어기고 희망퇴직을 권한 경영진들을 처벌한다고 당장 상황이 달라질 일도 아니었다"며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어린 사원들을 지키지 못한 죄로 '신입사원에게 희망퇴직을 강요한 비정한 인간'으로 낙인찍혔던 순간은 죽음과 같이 힘든 시간이 됐다"고 털어놓는다.

이처럼 모든 이야기안에서 박 회장은 ‘사람의 소중함’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태도를 드러낸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어려운 순간 가장 의지하는 것은 사람이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해왔다는 게 그가 삶을 살아오며 깨달은 지론이었다고 말한다. 박 회장은 "돌이켜 봤을 때 가장 큰 공부를 한 것은 변화와 사람에 관한 것"이라며 "기존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을 새 사람으로 바꿔 변화를 추구하는게 옳을것 같지만 경험없는 변화 추구자는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강조한다.
구조조정·혁신·위기극복 모두 고통스런 과정
책은 기업인으로서 박용만 스스로의 경험도 풀어놓는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구조조정이라는 극한의 파고를 넘은 일, 획기적 인수합병(M&A)를 통해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간 일, 대한상의와 정부와의 협업 등 기업인으로서 펼쳐놓은 사업 이야기는 당시 상황을 그리게 될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들린다. 나아가 협상상대의 블러핑(게임에서 자신의 패가 좋지 않을 때, 상대를 속이기 위하여 허풍을 떠는 전략)을 구분하는 방법이나 컨설팅사를 활용하는 방법들을 통해 보여주는 그의 인수합병 스킬은 영화 '머니볼' 못지 않은 생생함을 전달한다.

그는 그런 경험들 안에서 스스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털어놓는다. "구조조정, 위기 극복, 변화와 혁신, 모두 각각 다를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고통스런 과정이라는 점이다. 가진 것을 파는 것도 고통, 눈에 보이는 가능성을 오늘의 생존 때문에 포기하는 것도 고통, 동료를 떠나보내는 것 역시 말로 할 필요조차 없이 가장 큰 고통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문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게 출판사 측 후문이다. 일부 문장을 고쳐 써 보내기라도 하면 박 회장은 즉각 "이렇게 내가 쓴 문장을 다 고쳐버리면 이게 남의 글이지 내 글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패턴을 그대로 읽어내게 하려면 제 말투나 문장 그대로 들어갔으면 해요."라고 말했다는게 출판사 관계자 설명이다.

실제로 책에 "글은 오로지 나 혼자 들어앉아야 글이 되고, 그래야 솔직한 글이된다…글쓰는 작업 속에 남이 같이 들어가면 글을 어지럽힐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솔직하지 못하고 남의 눈에 편안한 글이 되고 만다"고 말하는 대목은 글쓰기에 대한, 또 스스로에 대한 박 회장의 뚜렷한 신념을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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