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엔터테인먼트산업은 전형적인 ‘천수답 업종’이었다. 소속 연예인이 인기를 얻으면 돈을 벌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망했다. 업의 본질을 바꾼 건 1996년 H.O.T.를 데뷔시킨 SM엔터테인먼트였다. 연습생 육성부터 수익 창출까지 전 과정을 책임져 ‘히트 그룹’을 줄줄이 내놨고, 2000년에는 코스닥시장에 회사를 상장시켜 대형화·체계화를 이룩했다. 이후 JYP와 YG엔터테인먼트 등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했지만 엔터산업의 수익 구조는 20여 년간 비슷했다.
랜선 콘서트·VR 팬미팅…엔터산업이 'IT 플랫폼' 꿈의 무대로
정체돼 있던 엔터산업에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은 건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다. SM은 지난해 4월 세계 최초로 유료 온라인 콘서트 ‘비욘드 라이브’를 시작했다. 방탄소년단(BTS)의 온라인 콘서트는 1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지난달 27일 네이버가 빅히트엔터테인먼트에 4119억원을 투자하고 양사의 팬 커뮤니티 플랫폼을 하나로 합치기로 하는 등 정보기술(IT) 기업들의 투자도 줄을 잇는다. 엔터산업이 IT와 결합해 새로운 차원의 비즈니스로 도약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주요 엔터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베스트투자증권은 최근 빅히트, SM, JYP, YG 등 4개 엔터사의 합산 매출이 623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0.3% 늘었고, 영업이익(661억원)은 93.3% 증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2일 종가 기준 이들 회사의 시가총액은 △빅히트 8조2825억원 △JYP 1조2105억원 △YG 8747억원 △SM 7364억원으로 총 10조원을 넘어섰다.

엔터사들이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거둔 건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 음반 집중 발매 및 온라인 공연 전환으로 대응한 결과다. BTS가 대표적이다. BTS는 지난해 국내에서 싱글·정규 포함 앨범 3장을, 일본에선 정규 앨범 1장을 내는 등 앨범 출시 빈도를 예년보다 두 배 늘렸다. 유료 온라인 콘서트도 대성공을 거뒀다. 지난해 6월 ‘방방콘’은 전 세계 75만 명이, 10월 ‘맵 오브더 솔 원’은 99만3000명이 봤다. 특히 엔터산업 주 소비자인 젊은 층을 노려 가상현실 등 신기술을 적극 도입한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지난해 9월 블랙핑크가 가상현실 앱 ‘제페토’에서 연 가상 팬사인회, 지난달 27일 통합한 네이버의 브이라이브·빅히트의 위버스 등 팬 커뮤니티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SM은 지난해 5월 전 세계 12만 명이 본 슈퍼주니어의 온라인 콘서트 ‘비욘드 라이브’에서 멤버 최시원을 12m 크기의 혼합현실(MR) 이미지로 깜짝 등장시켜 이목을 끌었다.

엔터산업의 수익 모델이 다양하게 창출되자 국내 IT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K팝 관련 투자에 가세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위버스와 브이라이브 통합을 통해 BTS, 블랙핑크 등 주요 아티스트 대다수를 확보한 네이버가 K팝 플랫폼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모양새다. 후발 IT 기업들은 인공지능(AI) 등 자사가 보유한 기술을 총동원해 네이버를 추격한다는 계획이다. 엔씨소프트는 지난달 K팝 플랫폼 ‘유니버스’를 출시하고 기존 게임 개발에 썼던 AI 기술을 활용해 실제 연예인과 통화하는 것 같은 ‘프라이빗 콜’ 기능을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연내 CJ ENM과 협력해 관련 합작법인도 설립한다. 게임 운영 노하우를 살려 앨범 구매 등 다양한 팬덤 활동을 인증하면 오프라인 팬미팅 참여권 등으로 보상하는 방식도 도입할 계획이다. 반면 카카오는 K팝 유통보다 웹소설과 웹툰 등 콘텐츠 생산을 포함한 수직계열화를 추구한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엔터산업의 체질이 플랫폼 산업과 비슷하게 변하면서 산업 자체의 가치가 급격히 오르고 있다”며 “자율주행차 기술로 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엔터 콘텐츠 수요가 늘고, AI로 맞춤형 아이돌을 만들 수 있게 되는 등 엔터산업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내다봤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