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백제와 신라 운명 갈라놓은 '관산성 전투'
서기 554년 9월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있었던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 군대가 맞붙었다. 진성에서 펼쳐진 1차 전투는 가야의 여러 나라와 왜의 군사 지원까지 받은 백제의 승리였다. 하지만 신라의 깊숙한 영역인 구타모라새에서 벌어진 2차 전투는 쉽지 않았다.

왕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은 3만여 명. 금관가야 구형왕의 셋째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이 신라군을 이끌고 백제에 맞섰다. 전투가 지루하게 이어지자 백제의 성왕은 아들을 위문하러 보병과 기병 50여 기를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정보를 입수하고 옥천의 구진베루(狗川)에서 매복한 신라군에 잡혀 죽었다. 대혼란에 빠진 백제군은 3만 명에 가까운 장졸과 마필을 잃고 대패했다.

백제사 연구의 대가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역사의 맞수 1 :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에서 이 ‘관산성 대회전’이 성왕과 진흥왕은 물론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고 설명한다. 관산성 패전 이후 백제에서는 왕권이 흔들리며 8개의 대귀족 가문을 중심으로 한 정치 운영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반면 신라 진흥왕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신라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군사조직 정비, 신무기 개발, 왕권 중심의 불교 치국책과 호국불교 강화 등이 뒤따랐다. 진흥왕은 이를 기반으로 백제, 고구려, 가야 등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백제 편에 섰던 가야제국은 모두 멸망했다. 지증왕이 국호 ‘신라’에 부여했던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을 날마다 새롭게 해 사방을 망라한다)’의 의미를 실현해 나갔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놓았다.

노 교수는 성왕과 진흥왕의 맞대결은 선대 왕들이 놓은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무령왕대부터의 정치·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비 천도를 단행하고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한 성왕, 지증왕과 법흥왕의 체제 정비를 이어받아 화랑도를 창설하고 인재를 등용한 진흥왕의 사례가 대비된다.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접전, 왜와 중국 등을 활용하고 견제하는 외교력과 인재 활용, 첩보전 등이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