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드로잉 편지' 출간
백남준이 유치원 친구에게 보낸 73장의 편지

1996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미국에서 쓰러진 백남준(1932~2006)은 몇 달간의 재활 치료 끝에 퇴원했다.

투병 생활을 하던 백남준은 그해 9월 첫사랑으로 알려진 유치원 친구에게 항공우편을 보냈다.

55.5×74.5㎝ 크기 판화지에 사진 이미지를 붙이고 색깔 펜, 크레용 등 다양한 필기구로 어릴 적 기억들, 시 구절 등을 낙서한 듯 써넣은 73장의 드로잉 작품이자 편지였다.

편지를 받은 이는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백남준과 유치원을 함께 다닌 수필가 이경희(88)였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된 백남준이 한국을 떠난 지 35년 만인 1984년 귀국해 기자들에게 "유치원 친구 이경희가 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두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백남준의 드로잉 편지'(태학사 펴냄)는 이경희가 당시 백남준에게 받은 73장의 작품을 한권으로 엮은 작품집이다.

이경희에 따르면 백남준은 쓰러지기 전인 1994년 식사 자리에서 나온 작품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가 "어떻게 경희와의 약속을 잊어버리냐"며 퇴원 후 드로잉을 보냈다.

백남준은 "작품들은 병원에서 퇴원한 후 첫 번째로 한 작업"이라며 "지금껏 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고, 앞으로도 그런 작품은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희는 책머리에 "그가 쓰러져서 몸이 불편한데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문턱에서 작업을 했다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나는 슬프기만 했다"고 적었다.

콜라주 형식의 작품에는 백남준이 과거 기억을 은유하는 언어, 시구, 이미지, 기호들로 가득 찼다.

백남준 할아버지 장례 때 상여차가 지나가는 장면,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1963)의 TV 화면, 비디오 설치 앞의 나체 여성 퍼포먼스, 수학 기호까지 다양하다.

"자, 밥 먹자", "기동차를 타고 뚝섬에 원족 가자", "칙칙폭폭 기차가 떠난다" 등 유년기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나타내는 글들도 곳곳에 보인다.

사진에 덧붙인 백남준의 짧은 메시지는 난해하지만, 이경희였기에 이를 해석할 수 있었다.

책 속 각 작품에는 그의 해석이 붙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설치물 앞 나체 여성 퍼포먼스 사진 옆에는 '?+?=??' 등과 같은 기호들을 적어 넣었다.

"백남준이 나의 책에 물음표 두 개로 만든 하트 사인을 해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이 사인은 아무에게나 해주지 않아'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해준다는 뜻이었죠."
188쪽. 1만9천500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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