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게르기예프(가운데)가 공연 직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운데)가 공연 직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오케스트라가 러시아 선율로 차가운 서울의 겨울을 적셨다. 10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다.

마린스키오케스트라는 플루트 연주가 인상적인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으로 차분하게 시작했다. 이어 클라라 주미 강과 함께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흘렀다. 1악장의 서정적인 선율 속 화려한 독주 기교가 돋보였다. 애절하고 감미로운 2악장을 지나 관현악의 힘찬 서주로 시작해 활력과 열기를 더해가는 3악장으로 이어졌다. 클라라 주미 강은 우아하고 노련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담백함으로 곡을 소화했다. 앙코르곡인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 3악장은 은은한 여운을 남겼다.

2부는 라벨이 관현악으로 편곡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륵스키가 화가인 친구 하르트만의 유작전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 프롬나드(산책)라는 제목의 전주곡으로 출발해 열 개의 그림이 열 곡의 소품으로 이어진다. 마린스키오케스트라는 첫 프롬나드에 이은 ‘난쟁이’부터 음량으로 객석을 압도했다. 비장한 ‘비들로’, 소란스러운 ‘리모주의 시장’을 지나 웅장하게 폭발하는 ‘키예프의 성문’에 이르렀다. 장중한 금관과 수려한 목관을 통해 작품은 입체적으로 되살아났고 현이 촘촘하게 뒤를 받쳐 생기를 더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게르기예프가 수시로 쥐었다 놓았다 하는 급격한 템포 변화에 익숙한 듯 지휘자의 움직임과 한몸인 것처럼 연주했다. 게르기예프는 1978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전쟁과 평화’로 데뷔했다. 1988년 마린스키 극장의 음악감독, 1996년엔 총예술감독으로 임명됐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의 일체감은 올 6월 내한한 헝가리 출신 지휘자 이반 피셔와 그가 35년간 이끌어온 부다페스트페스티벌오케스트라(BFO)의 연주를 연상케 했다.

거듭된 커튼콜에도 그치지 않는 박수에 게르기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중 자장가와 피날레,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앙코르곡으로 선사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